대타자의 부흥
라깡의 성도착의 구조를 한마디로 말하면 '대타자 부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대타자를 살려내는 부흥의 가공을 통한 주이상스의 소환이 도착증자가 목적하는 바이다 .
도착증자가 부흥 시키려는 대타자는 상징계 대타자가 아니라, 거세 이전의 빗금없는 대타자A이다. 언어의 거세이전 다형적 충동의 세계에서 유아의 신체는 쾌락이 전부인 신체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주이상스의 대상이고, 이 팔루스와 아이는 자신을 동일시 한다. 이들 사이에 아버지의 개입으로 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와 아기는 서로를 쾌락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어머니는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야 하고, 아이는 법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 어머니 대타자도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면서 거세된다. 죽은 대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주체는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머니대타자를 주이상스의 화신으로 만든다.
신경증자의 상실한 주이상스는 유령과 같은 대상a가 된다. 대상a는 알 수 없는 증상으로 돌출될 뿐, 상실한 것의 보상에 관해서는 언제나 실패할 뿐이다. 그러나 성도착자는 상실한 주이상스를 불러내는데 성공하여, 쾌락한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적극적으로 대체하려고 일종의 '설정'을 마련한다. 페티쉬는 대타자주이상스의 절편을 소유함으로써 살아있는 대타자를 소환하기 위한 미끼다. 빼앗긴 주이상스를 소환하려면 죽은 신을 살려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그가 설치하는 무대의 소품은 '스타킹'과 같은 어머니의 일부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무한쾌락은 어쩌면 대타자의 장난감이 되고자 하는 협소한 쾌락일 뿐이다. 신경증자에게 대타자는 죽은 신이지만, 도착증자에게 대타자는 존재하는 신이 된다.
신경증자와 도착증자 사이
신경증자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한채 욕망 속에 던져진다. 도착증자는 욕망의 환유를 차단하는 기예를 발휘하여 대타자의 주이상스의 자리에 가고자 한다.
신경증자에게 관음은 수치심을 불러일으키지만 도착증자에게 관음증은 수치심을 초과하는 쾌락이다. 신경증자는 '응시'의 충동은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승화 될 수 도 있고, 불안을 야기하는 공포일 수도 있지만, 도착증자는 관음을 관음하거나, 노출증을 통해서 대타자의 응시를 적극적으로 불러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살아있는 '응시' 즉, '여고생들의 눈들' 인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 신체의 생물성(신체사물의 존재감)'이다.
신경증자들도 흔히 '관종'이라 불리는 형태로 응시의 쾌락을 즐기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아버지에 법에 위반되지 않기에 도착증자의 쾌락을 모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증자에게 "도착적이다"라는 말은 수치심을 초과하여 적극적으로 '물신'을 향유하려고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도착증자는 '법'을 초과해야만 그들의 쾌락이 보장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거세되지 않은 대타자가 살아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이상스는 누구의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살아있는 대타자에 의해 그들 역시 소외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쾌락은 그들의 것이 아닌 대타자의 주이상스이기 때문이다. 라깡적 윤리에 비추어 보면 도착증자의 역시 대타자에 종속되어 있는 비주체적인 존재일 뿐이다. 신경증자도 도착증자도 모두 대타자의 주이상스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대타자라고 해서 그들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대타자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라깡은 우리 모두는 '도착증자'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바는 우리가 '문명'을 물신처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증자들은 대타자의 팔루스를 물신으로 삼는다. " 신경증자는 문명(아버지판본)을 통해 성적인 욕망을 실현하므로 우리 모두가 도착증자(백상현 강의)"라는 의미이다. 팔루스의 차단으로 보자면 성도착자가 월등할 것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성도착자가 세운 물신이 전례없는 새로운 팔루스라면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는 입장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끊임없이 죽은 대타자의 망령과 살아있는 대타자를 왔다갔다하는 불안속에서 가끔 정박하여 정신을 차려보면 세상이 멈춘듯 적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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