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법이다. 정신분석 경험에 의해 드러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도착증, 즉 욕망이 법의 구성, 다시 말해 법의 전복으로 출현하는 곳에서조차 욕망은 법의 지지대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도착증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제약 없는 만족으로 바깥에서 출현하는 것이 사실은 방어이자 어떤 법의 실천적 사용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도착증자는 자신의 활동을 통해 자신이 어떤 주이상스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_ 1963년 2월 27일 세미나에서, 라깡
법이 욕망을 금지할 때, 금지는 폐기할 수 없는 욕망을 생산하며 욕망은 다시 새로운 차원의 법으로 쓰여진다. 법은 욕망을 금지하여 그 힘을 잃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욕망을 재구성하여 더욱 강력한 흡인력으로 존재를 압박해오는 절대적 지위에 서는 것이다.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최초의 신화적 기원에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금지되고 거세되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욕망은 끝없이 다른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금지되어야만 하는 운명으로 태어난 욕망은 (근친상간적이기에) 필연적으로 변형되며, 금지를 부인하는 메커니즘 혹은 시나리오를 통해서 욕망이 외형을 바꾸는 도착증의 경우에서마저도 그것은 금지를 정복해낸 주체의 승리라는 귀결이 아닌, 도착적 욕망이라고 하는 막강한 법에 대한 종속구조의 지배 아래로 주체를 위치시킨다.
도착증의 한 유형으로서 페티시스트에게 (상실되었어야 할) 대상은 상실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 실존한다. 그러나 도착적 대상물을 통해 어머니의 거세된(소유되지 않았던) 팔루스를 대체함으로써 어머니의 거세와 법의 금지를 부인하더라도 결국 도착증자는 피할 수 없는 진실에 직면해야 한다. 실정적 대상, (마땅히 상실되었어야 하지만) 상실되지 않은 것으로 고착되는 그것은 필경 라깡에 의해 상블랑이라고 명명된 無의 가면, 無의 베일을 쓰고 있다. 베일 뒤에는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의 저서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위 첫문단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 정신과의사이자 분석가 다니엘르 브리오는 자신의 환자 퀭탱의 임상사례를 통해 페티시즘을 다룬다.
처음에, 10년째 우울증과 불안발작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던 41세의 그를 괴롭히는 가장 큰 고통은 건강염려증이나 사회적 고립, 직업적 부적응 혹은 ‘아무도 내가 무엇으로 고통 받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 탓인 듯했다. 5개월쯤 지난 시점에 퀭탱은 말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환상을 갖고 있지만 환상에 대해 알지 못해요. 그런데 저도 환상이 있죠. 문제는 제가 환상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거죠. 저는 늘 여자의 발에 끌렸어요. 특히 신발을 벗고 있는 여자의 발에요. 발에서 휜 부분이 저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용해요. 저는 자제할 수가 없어요. 제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퀭탱은 자신이 발을 매력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발바닥에 약간의 각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여성의 (주로 그보다 나이가 많은) 발바닥의 굴곡은 대상a 곧 상실된 대상을 의미하며 상징적 의미에서 발바닥 ‘표면 위’의 어떤 것인 각질은 팔루스를 뜻한다. 여성, 즉 어머니에게 거세 이전의 존재, 팔루스를 소유한 자의 위상이 부여되는 것이다.
퀭탱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페티시스트에게 페티시즘은 어떤 증상보다 여실하게 ‘성적인’ 충동의 형태로 작용하고 행위되면서 위반의 쾌락과 그에 상응하는 죄의식이라는 고통을 주체에게 귀속시킨다. 페티시스트는 왜 페티시즘을 욕망하는가, 라는 문제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범주의 욕망이라는 현실 너머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페티시즘은 거세와 금지, 법의 작동에 대한 부인이라는 측면에서 어머니에게 팔루스를 소유한 자의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금지된 욕망에 정당성을 얻어내려는 시도일 수 있다. 주체 자신의 페티시즘은 어머니를 위한, ‘숭고한’ 작업이 되는 것이다.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깡의 언명은 신경증 뿐만 아니라 도착증에서도 대타자를 위한 주이상스에 복무하는 주체를 말하게 된다.
결국 페티시즘은 일반적인 성애의 패턴 속에서는 (그것은 ‘상실된’ 대상으로서의 어머니를 전제하기에) 주체의 현재에 재현되어야 할, 어머니에 대한 특별하고도 영속적인 사랑을 담아낼 수 없다는 고통의 발화, 다시 말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상연되는 어떤 무대인 셈이다.
도착증의 또다른 유형으로서 가학-피학의 경우는 1919년 프로이트의 논문 <어떤 아이가 매를 맞고 있어요>에서 다루어진다. (1915년의 <본능과 그 변화>에서도 사디즘과 마조히즘, 관음증과 노출증을 분석하고 있다.) 위 논문의 첫문장은 정신분석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어떤 아이가 매를 맞는’ 환상에 빠졌다고 그처럼 자주 고백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라는 프로이트의 소회로 시작한다. 프로이트의 관찰에 의하면 이 환상에는 즐거운 느낌이 수반되어 있다. 이러한 환상에 실제의 체벌 경험이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맞고 있는 아이는 환상을 일으킨 당사자가 아니라는 관찰 결과를 마주한 프로이트는 ‘맞고 있는 아이는 누구였는가?’, ‘환상을 일으키고 있던 아이 자신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아이였는가?’, ‘아이를 때리고 있는 사람은 누구였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 환상이 세 단계를 거쳐 도출되는 과정을 풀이한다. 첫번째 단계인 <나의 아버지가 그 아이를 때리고 있었어요>에서는 아버지가 누군가를, 즉 ‘내가 미워하는 아이’를 때리는 것으로 바라본다. '어떤 아이=내가 미워하는 아이'인 것이다.
두번째 단계에서 맞는 아이는 그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 바로 환상을 일으키는 아이 자신이 되어 환상은 이제 <나는 아버지에게 맞고 있어요>로 변모한다. 프로이트는 이 단계가 완전하게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피학적 구조를 작동시키는 것은 억압과 죄의식에 따른 보상적 처벌이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때리는 사람의 실체가 불명확해지거나 다른 권위자들로 대체되며 환상을 일으키는 아이 자신은 뷰파인더 뒤로 물러나 <나는 아마 구경을 하고 있어요>라는 말로 설명된다.
중요한 것은 매 맞는 아이의 환상 속에서 아버지는 아이가 사랑받기 원하는 대상이며, 맞고 있는 아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로채는 다른 아이(내가 미워하는 아이, 주로 형제자매)라는 지점으로, 이 환상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문장은 <아버지는 다른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 사랑해요>인 것이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흐름 속에서 환상은 조금씩 다르게 표출되는 듯하지만, 마지막 문장에 가서야, 완전히 다른 무의식적 원소망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0)어떤 아이가 매를 맞고 있어요
1)나의 아버지가 그 아이를 때리고 있었어요
2)나는 아버지에게 맞고 있어요
3)나는 아마 구경을 하고 있어요
0-0)아버지는 다른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 사랑해요
어떤 아이가 매를 맞고 있다는 환상은 오직 사랑으로 충만했던 전능의 왕국에서 추방당한 존재의, 전능성에의 향수라는 무의식의 소망이 낳은 전도된 형태의 환상이다. 완전한 사랑의 대상이 됨으로써 존재의 불완전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망은 뒤집혀 전도되고 퇴행적으로 고착되었다. 이것이 도착이라는 현상의 구조이다.
그러므로 피학 또는 그것에 대한 동일시적 만족으로서의 가학적 소망은 구조 속에 숨겨져 있으며, 이와 같은 도착적 환상과 그 구조는 자아발달과정의 보편적 속성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 사랑을 빼앗긴 뒤에 찾아오는, (다시 한 번 밀란 쿤데라에게서 그 표현을 빌려와야 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가학-피학의 환상 혹은 그것에의 무의식적 욕망은 도착증자의 것이 아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그렇듯이, 우리 모두의 것이며 그것이 남기는 상흔이다. 다만 도착증자는 '無의 가면'인 상블랑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종국에는 '無'인 사실을 부인하며, 사라진 팔루스의 재생 혹은 잃어버린 완전한 사랑의 회수를 <행위하려는> 자들일 뿐이다. 욕망, 그리고 행위의 간극은 그리 가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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