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 질투

여왕과 여섯 남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5. 22. 15:08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무슨 이야기인가요?”

“지어낸 이야기요.”

어느날, 진은 간밤에 지은 우화를 J에게 들려준다.

“<여왕과 여섯 남자> 이야기에요. 옛날 어느 나라에 여군주가 살고 있었어요. 성에는 여왕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온나라에서 차출된 남자들로 가득한 하렘이 있었고요. 그런데 하렘이 뭔지 아세요?”

“네, 알아요.”

“여군주는 하렘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만 몰두해서 대신들은 걱정이 많았죠. 그들은 이러다 여군주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거나 하는 헛소문이라도 퍼지는 날엔 나라에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무래도 지금의 하렘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군주의 파트너를 선발한다는 방을 붙였어요. 많은 남자들이 몰려들었고 대신들은 그 중 몇 명을 뽑아 여군주에게 데려갔어요.“

J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 같은 순한 눈을 하고 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블라인드 테스트였어요. 대신들은 남자들이 쉽게 군주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똑같은 옷을 입히고 가면을 씌워 한 명씩 차례로 여군주의 방에 들여 보냈어요. 첫번째 남자가 들어오자 여왕이 물었죠.

너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무엇을 가졌느냐?

네, 저는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졌습니다. 원하신다면 저의 돈으로 이 나라만한 땅을 사서 여왕께 바칠 수도 있습니다. 저를 당신의 남자로 받아주십시오.

만약 내가 너를 이 성에 들인 다음, 너의 돈을 모두 빼앗아 가진다면 너에게는 무엇이 남겠느냐? 너는 텅 빈 껍데기가 되겠구나. 그러면 너를 죽여버려도 나는 손해볼 것이 없겠는데, 이래도 내게 오겠느냐?

첫번째 남자는 하얗게 질려서 안녕히 계십시오, 인사만 겨우 하고 달아나 버렸어요. 두번째 남자가 들어왔어요. 이번에도 여왕은 물었어요.

너는 무엇을 가졌느냐?

저는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을 가졌습니다. 저를 여왕님의 남자로 받아주신다면 이웃나라를 쳐서 여왕님께 바치겠습니다.

오호라, 한 나라를 쓸어버릴 만한 검술을 가졌다면 그 칼로 나를 베는 일쯤은 식은죽먹기이겠구나. 니가 나를 베지 않으리란 걸 믿을 수 있게, 지금 여기서 팔 하나를 잘라보일 수 있겠느냐?

팔이 없으면 유일한 자랑인 검술을 영영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는 두번째 남자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묵묵부답이었어요. 여왕은 두번째 남자를 쫓아내고 이어서 세번째 남자를 들였죠. 남자가 들어오자 방 안이 환해졌어요.

니가 무엇을 가졌는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구나. 너는 젊고 아름다운 몸을 가졌다. 어떻게 해서 그런 아름다움을 갖게 되었느냐?

감사합니다, 여왕님. 저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잘생겼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감사히 여기며 열심히 외모와 몸가짐을 가꾸었더니 점점더 잘생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여왕이 뭐라고 했게요?“

갑자기 진이 묻자 J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모르겠어요.“

”여왕은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너를 독차지하려면 이 성의 지하감옥에 널 가두고 나만 볼 수 있게 해야겠구나. 더이상 너의 용모를 우러러보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니 아름다움은 점점 시들테고 나 또한 너한테 흥미를 잃고 결국 너를 버릴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나에게 오겠느냐?

사람들의 칭찬도 자신의 아름다움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세번째 남자도 황급히 달아났어요.“

”맞긴 하네요.“

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J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더 들어 봐요. 여기가 중요해요. 그 다음 네번째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자신만만하게 말했어요.

여왕이시여, 저는 수백명의 여자들에게 궁극의 기쁨을 선물한 밤의 제왕입니다. 모든 여자들이 저와 밤을 보내고 나면 저를 우러러 보며 감사해 마지 않습니다. 오늘밤 저는 여왕님께 천상의 기쁨을 맛보게 해드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여왕이 뭐라고 했게요?“

“음, 아까처럼… 가둬놓고 혼자서만 독차지하겠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럼 재미가 없죠, 똑같은 답이면! 들어 봐요. 여왕은 이렇게 말해요.

너는 그 여인들을 사랑했느냐?

아, 아닙니다, 여왕님!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여왕님께 드릴 기쁨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것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저의 기술과 함께 저의 사랑도 여왕님께 드릴 작정입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많은 여자들을 안았다면 답은 하나로구나. 너는 사랑을 모른다. 몇번쯤은 사랑이었을텐데 사랑하고도 그 가치를 모르니 사랑하지 않은 것이고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찌 나를 사랑하리라고 말하느냐. 꼴도 보기 싫다, 썩 물러 가라.

네번째 남자도 보기좋게 쫓겨났어요. 이쯤 되자 대신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죠. 이제 남은 후보는 셋 뿐이었으니까요. 돈도, 힘도, 눈 앞의 아름다움도 심지어는 손에 잡힐듯 가까웠던 쾌락도 여왕의 마음을 열지는 못했어요.“

”그렇네요. 더 들어봐야 알 수 있겠네요.“

”그렇죠. 다음 시간에 계속할게요.“

세션을 마칠 시간이 되자, 천일야화처럼 이야기는 다음시간으로 넘어간다.

분석가와 분석자. 정신분석에서 전이로 연결되지만 그것은 분석의 재료로서만 서로에게 유효한 관계. 진은 그 실체 없는 관계의 막다른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것이 아득한 절벽처럼 느껴진다. 벽인 줄 알았는데 벽은 없고 아래는 절벽이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은 진을 놓아주지 않는다. 더 나아가라고, 당신의 진실을 찾아내라고, 그 모든 기억들과 감정들을 대면하라고. 저절로 움직이는 무빙워크처럼 분석은 진을 데려간다. 돌아나가는 길은 없다.

원칙적으로 분석가는 분석에서 자신의 히스토리도 감정도 드러낼 수 없다. 분석가의 방은 분석자를 위한 전이의 실험실이고 분석가는 자신의 존재를 실험의 장치로 내어놓지만 자신의 전이(역전이)를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분석상황에 대한 적절한 해석만이 분석가에게 허락된 유일한 말하기이다. 분석자는 이 실험에서 재현되는 전이로부터, 분석가라는 끝없는 미지로부터, 깊게 파묻힌 자신만의 고통의 뿌리를 캐내어야 한다.
그러는 사이에 분석가는 자신의 역전이마저 뿌리를 드러내는 일을 각오해야만 한다. 일련의 과정은 묵시적이며, 언어로써 담아내기 어려운 무의식의 교류가 의식의 검열을 피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무의식이 연결되어 있다해도 현실의 차원에서 진은 영원히 알 수 없는 J의 삶, 그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은 질투를 느낀다. 꼭지점 하나가 지워진 삼각형 같은, 대상 없는 질투와의 대면에서 분석은 그것의 시원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시원이란 과연 우리가 예상하듯 오이디푸스적인 어떤 것일까. 아니면 어떤 악연의 트라우마적 반복일까. 오히려 (과거인 것만은 분명한) 그 시원을 탐색하려 할수록 존재의 퇴행만이 반복재생되는 것은 아닐까. 정신분석은 과거로의 되감기를 멈추고 지금 여기의 현재를 말하는 것으로써만 과거라는 상징계에 갇힌 존재의 고통은 타파될 수 있음을 깨달을 때까지, 오직 그 목적만을 위해 과거로의 탐색을 되풀이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꼭지점이 지워진 삼각형 혹은 그 시원 같은 것은 없으며, 분석의 전이는 폐기되는 것으로서만 유의미하다는 귀결을 손에 쥔채 막다른 절벽 끝에서 성큼 한발 나아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진은 다음 세션을 기다린다.

며칠 뒤 J는 약간의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진을 맞이한다.

“다음 이야기를 들어야겠네요.”

“그렇죠! 이제 다섯번째 남자 차례죠. 이번에도 여왕은 너만이 가진 능력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어요.

저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말에 담을 수 없는 깊은 마음을 거울처럼 비추어서, 저의 마음에 비친 그 모양을 보고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마음을 헤아려 보거라.

슬픔이 느껴집니다. 하렘의 남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곳에 갇힌 사람들이니 여왕님의 위엄에 무릎을 꿇을 수는 있으나 여왕님은 그런 방식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그들 곁에 가지 않으십니다. 제 앞에 다녀간 남자들 또한 나오는 길에 표정이 좋지 않았던 걸 보면, 여왕님이 원하는 것을 갖고 있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여왕님은 슬퍼하고 계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천하를 제압하는 여왕님의 권력 앞에서도 굽힘이 없는 당당함, 그것을 가진 남자입니다. 재력이나 무력 같은 것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가리려는 사람들은 결코 갖지 못하는 것이지요.

너는 그것을 가졌느냐?

저는 모릅니다. 여왕님만이 아십니다. 여왕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것이고 아니라고 하시면 아닌 것입니다.

너의 헤아림이 내 마음을 후련하게 하는구나. 또한 너란 사람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지게 만드는구나. 일단 밖에서 기다리도록 해라. 나머지 한 사람을 만나본 후에 정하도록 하겠다.

다섯번째 남자는 1차 합격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여섯번째 남자가 들어왔죠.

너는 무엇을 가졌느냐?

저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저 남들과 똑같이, 먹고살만큼의 돈을 벌어 평범하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 너는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고 지켜야할 무엇도 없기에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왕님 곁에 있는 것입니다. 여왕님 곁에서 여왕님만을 바라보는 한 사람으로 있겠습니다. 만일 곁에 있을 수 없을 때라도 여왕님을 생각하고 여왕님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있겠습니다. 저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가지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기에 드릴 수 있는 것은 저의 인생 뿐입니다.

나에게 너의 인생을 주겠다는 말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처럼 미덥게 들리는구나. 그런데 아무 것도 갖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너는 왜 모든 걸 가진 나에게 온 것이냐?

그 이유는 여왕님께서 저를 선택하신다면 그때 알려드리겠습니다.

좋다. 그럼 잠시 물러나 있도록 해라.

여왕은 다섯번째 남자와 여섯번째 남자 중에서 누굴 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가면을 벗은 얼굴을 보고 마음가는대로 정하기로 했죠. 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대신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다섯번째 남자가 사라진 거에요. 할 수 없이 대신들은 여섯번째 남자만을 여왕의 방으로 들여보냈어요.
여왕은 남자에게 가면을 벗으라 명령했어요. 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뒤에 천천히 가면을 벗었어요. 남자의 용모는 뛰어나진 않았지만 순수한 눈빛이 여왕의 마음에 들었어요.

저를 당신의 남자로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여왕의 남자이니 일어나셔서 저의 곁으로 오세요.

남자는 일어나서 여왕의 옆자리에 앉았어요. 가까이에서 보니 남자의 눈은 아이처럼 맑았어요.

그런데, 당신처럼 욕심없는 분이 왜 여기에 오셨나요? 이제 그 답을 말해주세요.

가진 것이 없어서인지 저에게 오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걸 가진 분이라면,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제가 모든 걸 가졌기 때문에, 더이상 아무 것도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아셨나요?

막연히 그럴 거란 생각으로 왔지만 여왕님을 만나고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요.

그렇군요. 참으로 신기한 능력이네요. 아까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사라져 버렸더군요.

제가 바로 그 다섯번째 남자입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죠? 가면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던 거군요. 왜 그렇게 하신 건가요?

여왕님으로부터 선택받는 것이 아니라 저 또한 여왕님을 선택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의 거울에 여왕님을 비추어 보고, 곁에 있고 싶은 분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의 능력을 알아보셨기에 저도 여왕님을 선택하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다섯번째 남자를 내치셨다면 여섯번째 남자도 없었을 겁니다.

같은 사람이었군요! 그저 저의 곁에 있겠다는 사람이 바로 깊은 지혜를 가진 그 분이었다니!

둘다 맘에 들었는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여왕은 기뻐했어요.“

”반전이 숨어 있었네요.”

J는 진의 이야기에서 분석가와 분석자의 관계를 연상한다. 알 수 없는 무의식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분석가. 이야기를 듣는 동안 J는 진이 자신에 대한 감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섯번째 남자는 J이고, 진의 욕망은 여섯번째 남자처럼 J가 곁에 있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는다. J의 해석을 진은 이미 예상하고 있을 것이기에. 또한 분석가의 말로써 전이가 고착되는 위험 때문이다.

그러나 진이 바란 것은 다른 것이다. 진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야기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머리맡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머니, 어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언어의 상징계를 지배하는 어머니 대타자를 분석상황에 불러오는 장치이다. 왜, 무엇을 위해서 어머니가 소환되는가.
전이 너머 진이 얻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다. 진은 ‘이야기’를 통해 전이 너머에서 모성의 에너지를 길어올리고자 한다. 그것은 애착이나 질투와 같은 전이감정의 파도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성애적 전이는 무의식에 진입하는 입구이자 표면이며, 전이를 뚫고 들어가 바라본 그 심연에는 진을 묶고 있는 고통의 근원이 있다. 진의 어머니, 그리고 누군가의 어머니인 진 자신, 그녀들의 손상된 모성이다. 잃어버린 이름, 어머니.

분석 세션에 이야기를 들고온 진의 모성적 요구를 J는 거부한다. 그것은 성적 본능에의 억압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분석의 대전제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J의 입장을, 설명 없이도 진은 이해하고 있다. 분석자 또한 무의식을 비추는 거울을 가지고 있으므로. 말한 적 없는 J의 역전이, 어머니로 인한 그의 고통 또한 진은 느낄 수 있다. 그 이해가, J를 비추는 진의 거울이, 그리고 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모성의 회복이라는 욕망으로 진을 이끈다.

아무 것도 갖지 못하였으나 오직 함께 있는 것만을 줄 수 있는, 이야기 속 여섯번째 남자는 어쩌면 분석이 J를 통해 경험하게 하는, 세상을 향한, 자신의 아이를 향한 진의 모성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분석의 끝에서 진이 되찾고 싶은 그녀 자신, 그것은  ‘어머니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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