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 질투

평범한 질투의 평범하지 않은 광기

라깡함께걷기 2023. 5. 23. 01:13

아마도 누군가는 자신 있게 나는 질투를 모른다고 나는 결코 질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상 그럴 수는 없다. 질투는 근원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질투를 모르지 않는다. 누구도 질투를 모를 수 없다. 지금 내가 질투하고 있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과거 언젠가 나는 질투했었고(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수는 있겠지만) 앞으로 언젠가 나는 질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운이 좋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라깡에 따르면, 질투란 인간이 ‘나를 형성하는’ 최초의 과정인 ‘거울 단계’가 낳는 ‘근원적 소외’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몇몇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질투는 곧바로 욕망의 덫-함정이 되어 우리를 옭아매고 나아가 헤어 나오질 못할 늪이 되어 우리를 침몰시킬 그러한 것이다. 가령 내가 갖고 싶은 능력을, 내가 연인으로 삼고 싶은 이성을, 내가 도달하고 싶은 사회적 위치를, 그러니까 내가 가장 욕망하는 것을 나의 경쟁자가 나 대신 (그것도 아마도 내가 믿기에는 너무도 ‘부당하게’) 차지하고 있다면....... 나는 질투에 빠져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질투는 우리가 일상에서 빠져들 수 있는, 가장 정상적(?) 광기다. 질투를 광기로 볼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항상 ‘지나치다’라는 점에 있다. 질투, 그것은 언제나 지나치고 공격적이다. 최종에서 질투는 언제나 상대의 ‘존재 절멸’까지 겨냥하기 때문이다.

상대에 대한 공격성의 유무 혹은 강약에 따라 사람들은 ‘질투’와 ‘선망’을 구분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지나친’ 공격성의 광기를 ‘선망’이라고 하고 그렇게까지 치닫지 않는 감정을 ‘질투’라고 하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둘 사이의 경계에 어떻게 명확한 선을 그을 수 있을 것인가. 질투는 언제나 둘 사이의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선망이라는 이웃집을 향해 (마치 자기 집인 양) 들어가 버릴 것처럼만 보이는데 말이다.

본질에서 질투와 선망은 결코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질투와 선망은 이란성 쌍둥이다(일란성 쌍둥이는 왜 아닐까). 둘은 이른바 유전자가 같다(태생이 같다). 근원에서 같다는 것이다.

질투의 그 ‘지나친 공격성’은 어떤 유래를 갖는가. 라깡은, 인간에게는 ‘원초적 공격성’이 있다고 자신의 연구의 이른 시기부터 말해왔다. 인간이 ‘최초의 나를 형성’할 때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고 그것이 ‘질투와 공격성을 낳았다’고 라깡은 보았던 것이다. 거울 단계 이론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거울 단계란, 부자유스러운 몸과 그에 어울리지 않게 발달된 시각 능력(지적 능력, 뇌)을 갖추고 태어나는 인간 특유의 ‘조산성’이라는 조건에 따라, 인간이 실제의 자신이 아닌 거울-이미지를 통해서 ‘최초의 자아상’을 형성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러한 거울 단계의 핵심은 인간 주체에게 자아를 형성하게 해주는 바로 그 이미지가 ‘타자의 이미지’라는 점에 있다. 즉 주체가 ‘타자를 나로 착각/오인함’으로써 나의 정체성 형성 과정은 ‘근원적 소외’의 과정이 되어버린다는 데 있다. 내가 타자를 나라고 믿게 되면서 실제로 나인 것은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거울 단계에서의 이러한 ‘소외’가 바로 인간주체가 겪게 되는 ‘최초의 상실’의 경험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최초의 상실은 아직 온전한 상실이 아니라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심리적 곤경의 가장 중요한 근원 중 하나가 아닐까.) 거울 단계의 과정이란 ‘이미지와의-관계’의 경험 곧 라깡이 말하는 상상계의 경험으로서, 그 안에서는 ‘닮은 것’만이 존재할 뿐 ‘다른 것’ 곧 타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울 단계 안에서 주체는 소외되지만 주체는 그것을 (타자에 의한) 소외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상계란 ‘동일자의 세계’다. 상상계적 인식 안에서 주체는 ‘닮은 것’만을 볼 수 있고 관계할 수 있다. 주체는 상상계 안에서 오직 자신과 ‘닮은 것’만을 보게 되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될 뿐이다. 따라서 주체는 그 이미지가 자신과 다른 것임을 알지 못한다. 주체는 자신이 ‘소외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상상계 안의 주체는 소외의 극복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거울 단계에서의 그리고 주체의 이후의 삶에서 끊임없이 동일한 거울 단계적 경험이 되풀이되는 ‘거울관계’(상상계적 이자관계) 안에서의 소외는 주체에게 ‘소외된 바로서의 슬픔’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주체가 소외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거울관계의 소외의 원인이 ‘주체의 오인’이기 때문이다. 소외는 오히려 이후 타자와의 거울관계 안에서 타자와 나를 분리된 개별자로 사유하지 못하는 ‘착란으로 반복’되고, 그것이 때때로 ‘지나친’ 감정의 광기로 치닫게 된다. 거울관계의 상상계적 인식, 바로 이것이 앞서 말한 ‘정상적 광기’의 출발점이고 ‘원초적 공격성’의 탄생 지점인 것이다.

소외란 ‘내가 타자가 된다’는 것이다. 나와 타자가 ‘동일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거울관계의 핵심은 소외를 통해서 내가 얻게 되는 정체성(동일성) 안에서 곧바로 내가 타자와 ‘경쟁’관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데에 있다. (질투가 바로 이 경쟁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내가 ‘보고 있는 타자’로 믿고 있는데 그 이미지의 또 다른 주인인 타자 또한 바로 거기 그 이미지의 자리에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자리’인 단 하나의 이미지에 대해 이미지의 주인이 둘인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하기에 결국 “거울 단계가 완성되는” 순간 “동류의 이마고와의 동일화와 원초적 질투의 드라마”가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격성은 우리가 나르시시즘적이라고 부르며 인간의 자아와 인간의 세계를 특징짓는 실체들의 영역의 형식적 구조를 규정하는 동일화 양식과 상관관계에 있는 경향성이다.”(에크리, ‘정신분석에서의 공격성’)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이론에서 라캉은 인간주체의 ‘원초적 공격성’의 단초를 찾아낸다. 프로이트에게 나르시시즘이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가 성애’ 곧 ‘자기를 쾌락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욕망의 구조다. 프로이트에게 자기애와 대상애의 차이는 나에게 ‘절박한’(!) 쾌락을 나로부터 얻느냐 대상으로부터 얻느냐의 차이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나 근원적인 것은 나르시시즘 곧 쾌락, ‘나르시시즘적 쾌락’이다. 라깡에게 거울관계는 정확히 나르시시즘적 쾌락의 테두리 안에 갇혀있는 것이다.

거울관계 안에서 주체는 매 경우 자신과 동일성 안에 있는 타자가 자신의 쾌락을 훔쳐가고 있음을, 자기로부터 탈취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하듯이, 그러한 상대를 독을 품어 쏘아죽일 듯이 “독기를 품은 시선으로 젖을 먹는 형제를 바라”보는 것은 따라서 아주 어린 나이 때, ‘내가 나의 최초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갈 때’ ‘원초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사건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상계적 거울관계가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서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자리를, 내가 무엇인가를 쾌락하기를 강렬하게 욕망하는 바로 그 자리를 나로부터 빼앗아 내가 누려야 할 쾌락을 나 대신 얻고 있다는 인식이 끊임없이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타자의 절멸을 욕망하게 된다는 것인데, 지젝이라면 이를 ‘내 안의 인종주의’라고 적절하게 부를지도 모르겠다.

현대의 인종주의는 (나는 이 개념에 쾌락의 향유와 관련해 타자를 공격하는 모든 일상의 분쟁과 관련시키고 싶다) 바로 나의 쾌락을 부당하게 빼앗는 나의 이웃을 향하고 있다. 내가 나에게 쾌락이 없는 이유는 (그가 나와 닮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들 곧 그를 제거해야 할 이유들을 나열하면서) 나와 닮은 타자가 나의 쾌락을 부당하게 탈취했기 때문이라고 믿는 순간 ‘내 안의 인종주의’ 즉 그것의 고전적인 근원에서는 ‘질투’인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이 가장 핵심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 본원적인 상실을 겪는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 존재가 상실하는 것은 바로 쾌락이다. 프로이트를 따라 ‘문명 속에서 불만/불편’을 운명적으로 겪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쾌락의 상실이라는 불편은 너무도 치명적이어서 (왜냐하면 정신분석이 말하는 쾌락이란 인간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는 결정적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리의 근원에서 욕망의 중심의 자리에 있게 된다. 우리는 모두 근원적으로 쾌락을 ‘절박하게’ 욕망한다는 것이다.

질투, 그러니까 거울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는 바로 이 쾌락을 내가 ‘나와 닮은 타인’(나의 자리를 차지하는 타인)에게 청구한다는 것에 있다. 내게 쾌락이 없고 너는 ‘아마도’ 쾌락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 쾌락은 네가 나로부터 부당하게 탈취한 것이다.......!

문제는 다시 소외 곧 상실의 문제다. 앞서 나는 거울관계에서 상실이 완전하지 않다고 언급했었는데, 상실한 쾌락이 여전히 주체인 나의 관점에서 ‘바로 내 앞에’, 눈앞의 타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식의 결론은 인간 욕망의 생명줄인 쾌락을 둔 적대적 경쟁에 치달음밖에 없는 것일 테다. 하지만 우리는 ‘두 번째’ 상실 그리고 상실이라는 단어의 뜻에 비추어 ‘진짜 상실’일 것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바로 언어-상징계에 의한 상실, 주체가 거세 콤플렉스를 통과하면서 자신을 쾌락이 거세된 존재로 상징계에 등록하는 바로 그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주체인 내가 언어-상징계의 세계 곧 인간 문명의 세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주체인 나로서는 나의 신체로부터 직접적인 쾌락을 상실하고(그것을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고) 상징계 안에서의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상실한 쾌락은 상징계 안으로 이첩되면서 나는 상징계 어딘가에 있을 (아마도 팔루스에 의해 방향지어질) 그 쾌락을 욕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상징계와 관련된 상실은 정확히 쾌락의 이동인 것인데, 그것은 주체인 나로서는 나의 쾌락에 대한 명백한 상실이며 그 상실된 쾌락은 내 앞의 존재를 벗어나 보다 추상적인 위치의 존재에게로 이동한다. 쾌락을 가진 존재가 더 이상 실제로 존재하는 타자가 아닌 것은, 그 존재가 프로이트의 죽은 아버지 곧 쾌락을 향유했다고 알려진, 그러니까 쾌락이 향유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결코 나 대신에 그 쾌락을 향유하고 있는 경쟁자는 더 이상 아닌 존재로서의 위상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자아이상’의 위상은 바로 이렇게 주체가 쾌락을 둘러싼 상상계적 경쟁을 벗어나 보다 안정적으로 욕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요컨대, 상징계와 관련된 쾌락의 상실은 곧 우리의 쾌락이 상징계로 이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울관계, 질투는 상징계 곧 대타자에로 이관된 쾌락을 다시 내 앞의 존재자인 소타자에게 청구하는 것이다. 상상계는 그렇게 내가 상실한 쾌락이 바로 내 앞에, 내 앞의 존재자의 자리에 있음을 확증하면서(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익숙한 일인가), 쾌락의 결핍에 대한 불만/불편을 대타자-상징계에게 구체적으로 청구할 수 있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폭력-공격성도 감내할 수 있는 명분의 미끼를 던져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질투의 모습으로, 공동체 안에서는 인종주의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는 바로 그것 말이다....... 쾌락, 그것은 아무도 자유롭게 하지 않는 자유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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