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죽음을 가져오고, 죽음 가운데 보존되는 삶이다.”
(모리스 블랑쇼, ‘문학 그리고 죽음에의 권리’)
블랑쇼에 따르면 우리는 “왜 글을 쓰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고서도 분명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대개 우리가 무엇인가를 쓸 때 그것을 왜 쓰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다시 블랑쇼를 인용하면, “작가가 글을 쓰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될 때, 글은 작가를 바라본다.” 쓰여지는, 잠시 후 곧 쓰여질 글은 하나의 물음이 된다. '지금 나는 무엇을 쓰는가? 그것이 무엇인가?'에서 시작해서 ‘왜 쓰는가?’ '왜 쓰려 하는가?' 그리고 ‘글쓰기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행렬의 물음이 되는 것이다. 내가 실용적 목적에 맞추어진 기능적 글쓰기를 벗어나 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작가'일 때, 나는 글쓰기를 하나의 물음의 형태로 마주하게 된다. 그때 글-물음은 더 이상 무언가에 대한 글쓰기가 아니고 따라서 더 이상 어떤 주어진 문제의 답변이기를 그친다. 글쓰는 나의 망설임이 시작된다. 그때 나에게는 글쓰기 자체가 망설임의 시간이 된다. 글쓰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기분에 휩싸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 안에 있다.
내가 여기서 ‘내가 작가일 때’라고 쓴 구절에서의 ‘작가’는 어떤 사회적 인증이 필요한 지위를 가리키지 않는다. 즉 소설가도 출판된 책의 저자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의 ‘작가’는 다만 글을 쓰는 자다. 글을 쓰면서 그 글쓰기가 그에게 순전한 물음만을 남기는 경험 안에 있게 되는 자다. 글이 어떤 특정한 사물에 대해 묻고 그 답을 구하는 경험이 아닐 때 글쓰기는 기표의 사슬 앞에 선 사람의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이 된다. 글쓰는 자의 정체성을 묻는다는 것이 아니다. 묻게 되는 것은 ‘누구’가 아니고 언제나 ‘무엇’이다. 여기서 단 하나의 질문의 순수함,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주어지고, 그 물음 앞에서 글 쓰는 자는 자기 자신을 잃는다.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 여기 글쓰기와 관련된 죽음의 이미지가 있다.
푸코는 ‘삶의 권력’에 대비되는 ‘죽음의 권리’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삶이라고 규정하는 것, 그러니까 리얼리티의 삶은 전적으로 권력에 의해 지배된다. 삶과 관련해서 권력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미시 권력’과 ‘생체권력’이라는 푸코의 개념은 권력이 얼마나 세세하게 그리고 예외 없이 우리 삶[생명]과 관계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푸코가 대안으로 제시한 ‘죽음의 권리’란, 이러한 '생명-권력' 곧 '대타자의 권력에 완전히 유착되어 있는 리얼리티의 삶'을 극복하는 것은 바로 죽음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라깡이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죽음충동’을 강조했던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푸코에게서든 라깡에서든 죽음은 물리적 자살이 아니라 ‘상징적 죽음’ 곧 대타자-상징계에서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écriture 곧 글쓰기라는 개념은 ‘언어에 의한 사물 살해’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언제나 ‘언어는 죽인다.’ 언어가 어떤 특정한 용도나 목적과 관련되기를 그칠 때 ‘언어에 의한 존재의 상실’이라는 '시원의 외상적 사건’이 바로 그 언어에 의해서, 그러니까 글쓰기를 통해서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 글쓰기는 내가 ‘저자’로서 ‘쓰는’ 그러한 것이 아닐 것이다. écriture로서의 글쓰기는 언제나 이미 쓰여졌고 여전히 쓰여지기를 멈추지 않는 그러한 것이기에 그렇다. 에크리튀르, 그것은 언제나 ‘증상’의 형식으로 내 신체 위에 쓰여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라깡이 ‘문자lettre’의 실재성을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das Es)이 말한다.’ 바로 실재가 쓰여진다는 말이다. 더 정확히는 기표를 통해서 실재가 ‘글자를 쓰듯이’ 우리 존재에 새겨진다는 것, 즉 움푹 파이는 형식으로, 음각(negative)으로 우리 안에 실재가 각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작가로서’ 글을 쓴다고 할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것(das Es)만이 말하고’, 그것이 문자를 통해서 말하기에, 나는 그것이 말하는 흐름과 리듬에 따라 ‘덩달아 무엇인가를 쓰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의 말’ 곧 실재의 목소리를 그대로 ‘베껴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하나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것과 유사한 것일 것이다. ‘공명’하는 것이다. ‘합주’의 비유도 적절할 것 같다.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손이 쓴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의 곡의 합주를 따라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손이기에 그러하다. 나는 내 손이 음정 하나 하나, 박자 하나 하나를 쫓아가는 것을 지켜보기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손이 제대로 또는 훌륭하게 연주해내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손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의 사유는 연주하는 나의 손을 지휘하지 못한다. 나는 그 손의 연주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모든 것을 손에 맡기고 나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고 오직 '기다린다'고 '인내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지 모르겠다. 내가 그것이 어떤 것에든 생각에 빠진다면 손은 곧바로 연주를 멈추어버릴 것이니 말이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기에 요구되는 것은 오직 '기다림'뿐이다. 그것이 말하기를, 내 손이 그것이 말할 때 공명하면서 연주하듯 무엇인가를 써내려가기를 나는 기다려야 한다.
글쓰기가 길을 잃는 경험인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글쓰기는 우리 '의식'의 정해진 모든 행로에서 벗어나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모든 것에 대한 기억, 곧 기존의 기표의 사슬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대한 거대한 망각과 함께 글쓰기가 실행된다. 나는 나를 잊으면 잊을수록 좋다. 내가 소년 혹은 노인인 누군가인 것을, 내가 남성인/여성인 누구인가를, 그리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내가 지금-여기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는 것이 좋다. 당연히 내가 쓰는 글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목적마저 잊는 것이 좋다. 그것들은 모두 글쓰기를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안에서 나는 나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나는 ‘나 자신을 적절히 균형잡을 수 있는 나’가 더 이상 아니게 된다.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모든 단어들을, 문장들을, 문단들을 나의 지배 아래 놓을 수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다 쓰여진 이후에야 하나의 문장으로, 하나의 문단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길을 잃는 경험이다. '기표와 기표 사이의 위태로운 외줄타기'다. 결국 최종에는 그 외줄 위에서의 위태로운 여행을 ‘억지로’ 끝내면서 매번 완성된(?) 하나의 글이 되지만, 그리고 그것을 평가받고 독자를 얻게 되지만, 글쓰기 자체의 경험은 결코 안정과 안착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본질로 한다는 사실이 달라지는것은 아니다. 매번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 때마다 작가들이 겪게 되는 동일한 곤경, 그 위기를 우리도 역시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바로 글을 쓸 때마다 바로 그 곤경을 겪는 자들, 바로 작가이기 때문이다.
독서는 그러한 글쓰기의 불안을 지배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다. 그래서 작가는, 글쓰는 자는 쓰기보다 읽기를 좋아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만 맞는 말이다. 읽기 또한 모험이기 때문이다. 읽기 또한 적잖이 자기-정체성을 벗어나는 경험인 것이다. 독자인 내가 저자인 그가 글을 쓰면서 겪었던 여정을 따라가면서 함께 겪지 않는다면 나는 그 작품을 결코 온전히 읽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독자는 쓰여진 글에 대해서 아주 안정적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글쓰기의 위험과는 충분한 거리를 둘 수 있다. 쓰여진 글로부터 나르시시즘적 쾌락만을 탐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독서가 그렇게 이루어진다. 아마도 라깡이 읽히지 않는 글을 쓰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축소하는’ 읽기로부터 다시 글쓰기의 강렬한 경험을 되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라깡은, 독자가 스스로 텍스트 안의 기표를 다루면서, 스스로 다시 쓰면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텍스트를 생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마치 시인들이 언어를 다루듯이, 독자에게 생산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욕망을 주는 시적 텍스트를 창안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왜 쓰는가. 죽기 위해서다. 푸코에 따르면, 삶의 권력에 맞선 죽음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다! 그래서 글쓰기는 위험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쓰면서 언제나 명시적으로 죽음을 선언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글을 쓸 때 우리가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표와 만나고, 그 기표에 우리의 리비도 곧 나의 생명을 실으면서 나는 죽는다. 기표에 어떤 것을 건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지금-여기서 ‘사랑’을 쓴다면 그 ‘사랑’이 기표에 의해서 죽게 된다. 적어도 내가 쓰고자 했던 ‘사랑’의 형상은 죽는다. 나는 그것을 썼기에 그것을 잃는다. 그래서 우리가 길을 잃는다. 혼란에 빠진다. 아무것도 명확한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원래 쓰고자 했던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 글을 쓰면서 주체인 나도 [카오스 속에서, 무의미 속에서] 죽고 대상[사랑]도 죽는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 ‘사랑’을 ‘쓰지 않았다면’ 그 사랑은 우리 안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쓰지 않는다면 한 사물의 존재는 상실되지 않겠지만 그 사물은 존재하지도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완전한 무인 것이다. 상징계 안에서 구멍으로서의 자리마저 갖지 않기에 그것은 실재조차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진짜 없다. 사물은 쓰여진 뒤에야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것은 ‘존재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잃어버린 것으로 다시 발견되는 대상’으로서 상징계에 구멍을 내면서 실재로 귀환하는 대상이겠지만 말이다.
상실만이 있는데 그러면 왜 쓰는가. 죽음만 있는데 왜 쓰는 것인가. 거기에 쾌락이 있어서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여기서의 쾌락은 통상의 육체적 쾌락도, 인정의 쾌락도 아닐 것이다. 글을 잘 써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도,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보통의 쾌락이란 바로 앞서의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도 너무 중요하다. 그러한 쾌락을 배제할 필요도 없고 배제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글쓰기가 죽음의 경험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가 실행된다면 그것은 글쓰기의 본질적 쾌락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 쾌락은 죽음의 쾌락, 죽음충동의 실현과 연결되어 있는 쾌락이다.
나는 아주 드물지만 글쓰기를 통해 즐거움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때마다 공통된 경험은 내가 무언가에 취한 듯 멈추지 않고 쓸 수 있었다는 것, 그때는 마치 글이 ‘저절로’[자동적으로!] 쓰여지고 있다고 잠시라도 내가 느꼈다는 것이다. 기표와 기표가 마치 제 짝을 만나듯이 결합하고 계속 이어지고 나는 그때 ‘쓰는 기쁨’을 느꼈다. 이른바 일필휘지, 그것이 왜 나에게 쾌락을 주었을까. 무엇보다 그 글쓰기에는 멈추지 않고 글을 쓰게 하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것이 내게 쾌락을 주었던 것 또한 틀림없다. 그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리비도인 것이 아니었을까. 기표에 의해 죽은 무엇이 글쓰기 안에서 기표와 함께 리비도로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언어는, 기표는 ‘죽인다.’ 이 죽음은 되돌릴 수 없다. 죽음의 자리는 공터다. 텅 비어 있다. 그것이 우리를 공황으로 내몬다.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한다. 무엇을 써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써야 하는가, 왜 쓰려 하게 되는가, 이렇게 글-물음이 탄생한다!] 바로 그때 그 죽음의 기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하나의 기표, 더 정확히는 그 기표가 사물을 죽이고 남긴 '무의미-공백'를 '향하여', 그 공백에 대한 나의 곤궁과 공황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의 기표가 찾아온다. 그 기표는 '나'를 찾는다. 하나의 기표를 위해 주체[진정한 기의]를 대리하기 위해 또 하나의 기표가 오는 것이다. 그때 의식에서 추방되었던 무의식의 주체일, ‘나-주체’가 ‘잠시라도’ 살아난다. 그 주체는 언어에 의해 살해된 큰사물의 대표로서 살아난다. 나-무의식의 주체는 나를 찾아오는 기표를 환영하기 위해서 부활한다/태어난다.
이렇게 기표의 연결이 이어질 때 나는 ‘살아 있다/산다.’ 글쓰기는 죽은 나[억압된 나의 존재]를 부활시킨다. 물론 그 ‘나’는 지금-여기의 나 곧 자아가 아니다. 글을 쓸 때의 나는 자아의 가면에서 벗어나 그 알 수 없는 누구로서 글쓰기와 함께 한다. 그 글쓰기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이 (대)타자의 승인의 산물인 현실의 쾌락을 언제나 넘어서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그 글쓰기를 통해서 실재가 귀환하기 때문인 것이고, 그 실재의 귀환이 나에게 명백한 쾌락/주이상스를 선물하기 때문이며, 내가 그렇게 주이상스를 향유할 때마다 그때의 나는 [의식적 자아의 입장에는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진짜 나’ 곧 '무의식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왜 쓰는가. 나이기 위해서, '나-되기를 위해서'다. 하지만 왜 쓰지 못하는가. '글을 쓰는 나는 결코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서 언제나 타자인 나의 무의식, 바로 그것이 쓸 수 있을 때까지 손을 펜을 놓지 않아야 한다.
다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글쓰기를 놓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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