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0. 새로운 인생

새로운 인생 (1) : 참되지 않은 인생은 새롭지 않다!

라깡함께걷기 2023. 11. 25. 13:13

두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어떻게 새 삶이 가능한가, 그리고 새로운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
 
‘새로운 삶’, 이 기표는 우리가 삶에 대해서 그것이 새로울 수도 있고 또한 낡을 수도 있다고 믿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 오늘의 나의 삶은 ‘낡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지금-여기의 삶은 언제나-이미 낡은 것이거나 낡은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의심한다[걱정한다].

삶은 낡아[늙어]간다. 더 냉혹한 인식에 따르면 오늘 나의 삶은 ‘이미’ 낡았다[충분히 늙어버렸다]. 삶은 멈추지 않고 낡아만 간다. 여기서 ‘낡음’의 이미지가 가리키는 것은 언제나 ‘죽음에 이르는 늙음’이며 어떠한 여정의 종결이다. 삶은 언제나 끝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나의 삶은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이’ 이렇게 끝을 맺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근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낡음’의 인식은 ‘슬픈’ 인식이다. 나의 삶이 ‘낡은 것이었을 때’, 나의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낡아져 버린’ 사실을 내가 깨달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절망과 우울은 이러한 ‘슬픈’ 깨달음의 결과다.
 

새로운 삶이란 어떤 것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주어진’ 삶이 오래되고 낡은 것이 되었을 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슬픔’에 빠지게 되었을 때 그 삶을 폐기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다시 태어남’의 사건, 부활의 사건, 이것만이 새로운 삶의 이미지일 것인가.


먼저 삶이 새로워진다고 할 때 그것이 우리의 생물학적인 육체의 재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점만은 명백하다. 육체는 결코 다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탄생이란, 나의 육체와 관련해서는, ‘단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다. ‘나의 유일한 시작’, ‘유일한 나의 시작’이다. 그렇기에 ‘이 삶은’ 우리의 ‘운명’이다! ‘유일무이한 것’(singularity), ‘단 하나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중하다.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유일한 것’, 그러한 의미에서의 ‘유일한 진짜’(실재the real로서의 일자)인 ‘나의 몸’. 내가 나의 몸으로 탄생함[탄생했음] 자체는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는 것일까. 나의 삶에서 무엇이 새롭게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중국 문화혁명 당시 ‘번신’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인간 개조’를 의도적으로 [따라서 폭력적으로] 수행하려고 했던 문화혁명 자체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도록 하자. 다만 그때에도 진정한 ‘변화’의 꿈-열망 안에서 실제로 그 변화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새로운 삶’에 대한 강렬한 기표를 남겼다는 것만을 지금은 주목해 보자. 바로 ‘번신’이라는 기표 말이다.
 
‘번신(翻身)’의 축자적 의미는 ‘몸을 뒤집다’이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은 몸을 뒤집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무슨 뜻일까. 앞서 말한 대로 우리의 몸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물리적 위상에서도]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 변화 불가능한 몸이 ‘뒤집어진다[이 기표에서 느껴지는 ‘전복’의 함의는 얼마나 강렬한가!].’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혁명’이라는 기표의 본질적인 함의 또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삶은 변화할 수 있다, 어떻게? 삶이 ‘다른 의미-방향(sense)’을 향해 뒤집어질 때 주어진 삶은 새로운 삶이 된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새롭게 태어나지 않지만 ‘마치 새로운 육체로 재탄생한 듯이’ 우리의 삶은 이전의 삶과는 ‘결코 같지 않은’ 새로운 삶이 되는 것이다.
 

유투브에서 우연히 그리 오래지 않은[대략 십여 년 전 아닐까 싶다] 바디우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제목은 이랬다: ‘왜 철학자는 낙관적이어야 하는가.’ 사회자가 묻는다: “희망은 있나요?” 바디우가 답한다: “나는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철학자의 일은 낙관적이 되는 것입니다.” 확연히 노인이 되어 있는 바디우, 우리가 보기에 사멸에 가까워진 그, ‘늙어’ ‘낡은 것이 되어버린’ 그는 ‘낙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늙지 않고’ ‘낡지 않은' 가치가 ‘새롭게’ 언제든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다른 텍스트들을 참조할 때 그가 말하는 ‘낙관’이란 ‘세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가능성에 대한 낙관으로 나에게는 읽혀졌다. 그리고 나는, 또한 우연한 계기로, 최근 그의 텍스트 <참된 삶>의 일부를 읽게 되었다.
 
‘Vita Nova’, 새로운 인생. 나는 이 주제를 마주하게 되자마자 바디우의 ‘la Vraie Vie’, 참된 삶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이렇게 되뇌었다: “참되지 않고 삶이 새로워질 수 있는가?”
 
새 것과 낡은 것의 차이란 무엇일까.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새 것과 낡은 것에 대한 세심한 분별이다. [나는 결국에 가서는 낡음의 자리에 ‘참되지 않은 것 곧 가짜’를, 새로움의 자리에 ‘참됨’을 위치시키게 될 것이다.] 새 것과 낡은 것의 대극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때때로 ‘지금-여기’를 낡았다고 느끼고 그것에 대해 고통 받으면서 그때마다 간절히 ‘새로움’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아니 언제나 우리를 이 ‘낡은 삶’으로부터 구해내서 새롭게 해줄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움’을 보증하는 것은 ‘시작’이다. 언제나 시작에는 새로움이 있다. 새로운 것만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새로움과 시작은 동일한 것이다. 새로움=시작! 우리 모두의 삶 또한 시작에서는 ‘새로운 삶으로서만’ 시작되었으리라. 그때 우리 삶은 분명 ‘새로운 삶’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삶은 ‘낡은 것’, 그리히여 새로워져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가진 것으로 전락해 버렸을까.
 
되풀이하지만 모든 삶의 시작은 ‘새로웠다!’ 시작의 삶에는 언제나 ‘새로움의 열정’ ‘새로움의 활기’를 품고  있었으리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모든 시작에는 ‘열정이 있었다’고. 왜냐하면 '시작이 곧 열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의 모든 출발점을 되돌아볼 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열정이다. 여기서 ‘열정’은 ‘사랑’이라는 기표로 바꿀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막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이른 시기 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삶의 ‘모든 것’에 대한 열정이고 모든 시작은 그러한 ‘삶의 모든 것에 대한 열정-사랑’과 함께 시작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삶의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작은 이후의 모든 욕망과 사랑의 여정의 시작인데 그것은 언제나 ‘최초의 열정’, 그 어느 순간보다 강렬한 열정의 시작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시작에 대한 회상’이든 그것이 정직한 것이라면 ‘그때 나는 뜨겁게 살아 있었다’는, 혹은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어쩌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명백한 사실, ‘정직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내가 열정에 빠져 있던 시절들을 돌이켜 볼 때―떠올려보니 꽤 여러 차례나 되었다, 비교적 최근의 일만 언급해 보면 내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교육분석 실천을 하게 되었다는 것 등에서 일종의 아주 특별한 ‘사건이 시작되었다’고 느꼈다―그때마다 나는 나의 삶이 [다시 혹은 비로소 혹은 또다시] ‘시작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시작에는 허망한 기대, 현세적인 무분별한 욕망도 끼어들기 마련이다. 아주 오래 전의 ‘시작’에서 나 또한 언젠가 내가 ‘역사에 남을’ 위대한 인물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그 기대를 놓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와 욕망은 결과적으로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고 내가 우울과 침체로 가라앉게 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현세적인 곧 상징계-상상계적인 기대와 욕망을 우리가 갖게 된다는[되어 있다는 ‘필연적인’?] 사실은 부인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 ‘나쁜’ 일만도 아닐 것이다. 그 기대를 이룰 때 우리는 행복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불행할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행복과 좌절[불행]이 결코 ‘새로운 삶’과 ‘낡은 삶’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삶이 ‘낡아서’ ‘낡아져만 가서’ 사멸하는 삶이 주는 ‘슬픔’은 현세의 성공과 실패로부터 곧바로 산출되는 결과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거꾸로 현세의 슬픔이 결국에는 ‘낡은 삶’의 슬픔으로 귀결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초점을 성공과 실패로부터 ‘새로움’과 ‘낡음’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낡음’이 왜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 하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왜 진정한 슬픔인가, 왜 그것이 더 중요한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낡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 왜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싶은가. 먼저 ‘삶-살아가기-그러한 살기의 즐거움’의 범주와 관련해 반대쪽에 있는 우울[증]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울은 ‘삶이 슬프다’는 것이다. 삶에 기쁨[즐거움, 쾌락]이 없다는 것이다. 어원적으로는 우울증은 ‘de’-‘pression’으로 풀이될 수 있다. 우울증에서는 ‘pression’ 곧 삶을 살아가게 하는 압력, 삶에 대한 열정과 욕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에너지가 ‘빠져버린다’[de-]. 이른바 ‘김이 새는 것’이다.
 
‘김빠진 삶’이라면 누가 우울하지 않을 것인가. ‘활기가 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사는 것을 누가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른바 정상적인 삶 또한 때때로 몹시 우울해진다. 우리는 그럴만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우울에 빠지는 것 자체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우울감을 이겨내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정상적인(!) ‘우울’[과 그 극복]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치명적 오인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인다는 점에 있다. 물론 만연한 오인, 우리의 상식을 지배하는 오인일 것이다.
 

나는 의심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우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마치 우울을 일으키는 요인이, 혹은 거꾸로 우리의 삶의 생기와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마치 ‘물질적인’ 형태로 그러니까 명확한 실체가 가지고 있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마치 고대의 서구의 형이상학적 사고에서 정신의 변화-흐름을 규정짓는 ‘정신적 물질’로서 ‘에테르’의 존재를 가정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삶 안으로 ‘정신적 실체’인 에테르가 들어오면 내 삶은 활기차게 되고 그것이 빠져나가면 우울해지는 식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로서는 사실상 이러한 논리를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전혀 허황되거나 비약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데, 실제로 우리가 ‘마치 우리의 현실 세계의 실패’를 삶에서의 에테르의 손실로서 받아들이고 거꾸로 현실에서의 성공을 에테르의 충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우울할 때 우리는 마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무엇, ‘물질과 같이 명확한 것’이 우리로부터 빠져나간 듯 느끼게 된다는 것을, 그로 인해 나를 파괴할 수도 있을 만큼의 치명적인 상실감을 겪게 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울할 때 우리는 이른바 ‘실체주의자’가 되어서 ‘실재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의 논점은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나의 심적 구조에 결손을 가져오거나 활기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부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결손-충전이 과연 ‘에테르’적인 것인가, 즉 실질적으로 일어나서 그것과 관련되어서 일어나는 결과까지 ‘물질적인 과정처럼 규정’할 수 있는 요인인가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 명명백백한 요인인가 하는 것 말이다.
 
반론은 즉각 가능하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우리 모두 ‘동일한’ 해석을, 동일한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근거가 될 것이다. 사태를 ‘물리적인 것처럼 명확히 규정하는 정신적 물질’이라는 에테르 개념은 우리 각자의 심리적 사태를 결코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할’ 에테르의 결손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누구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정신의 실체적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도 ‘동일한 요인으로’ 고통 받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만의 환상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기쁘고 슬프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에 결정하는 것으로 주어지는 ‘객관적 실체적 요소[요인]이란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현실적 좌절이 현실적 고통을 불러온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그 현실이라는 것이 하나의 ‘환상’ 곧 실재를 가리는 스크린의 기능을 하는 ‘가상의 세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이제 더 중요한 것으로서 강조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느끼는 현실적 고통은 실제로는 우리의 ‘진짜 삶’(la vraie vie)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드는 스크린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느끼는 고통이 나의 진짜 삶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이 내 진짜 삶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방해물 같아.” 현실적 고초 때문에 고통받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에 가까운’ 언명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삶의 실재를 감각함을 증언한다. '지금-여기'의 현실(이라 불리는 것)이 나의 진짜 삶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느낀다는 증언인 것이다.

이른바 ‘진짜 눈물의 공포’라는 지젝의 언명을 수정해서 표현해보면 이러한 사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짜’인 것에 대한 ‘슬픔’['가짜 눈물']이 언제나 나의 ‘진짜’-삶 곧 나 자신의 실재에 가까이 가는 것['진짜 눈물']에 무지와 무관심의 장벽[스크린]을 치면서 그것을 지나치게 ‘두렵게 한다’[공포]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실재적 사태를 망각하게 할 만큼 두렵게 한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현실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축소된 세계가 끊임없이 생산하는 가짜 눈물의 공포의 담화가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내가 어떤 경주에 참가한 경주자인데 경주 결과 내가 1등이 아니고 3등이라면, 아니 내가 아예 공식적 순위에도 들지 못했다면, 아니 나는 단지 ‘참가자’ 중 하나에 불과한 위치로 전락했다면, 그것도 나는 1등을 바랐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그리고 이른바 ‘순위’에 언제 들게 될지도 모르겠다면.......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우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서둘러 페소아를 소환하고 싶어진다. 내가 보기에 페소아는 현세의 ‘낡은 삶’과 늦은 밤 자신의 방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삶’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여기의 ‘고통’ ‘좌절’ ‘절망’은 결코 허구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을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에는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 그것은 실제로 ‘아프다.’ 그러나 그 삶과 ‘동시에’ ‘다른 삶’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페소아가 ‘만들어낸/만들어내는’ 삶이다. 글쓰기의 삶 말이다.

라깡을 따른다면 '근원에서 분열된 주체'인 우리의 운명의 '역설적'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의 선택은 우리에게 주어진 진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결코 '이것에서 저것으로' 이동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것과 저것 '둘 다'다. 우리는 그 둘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뒤집어지는' 방향의 화살표는 '여기에서 저기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뒤집힘, 전복은 단순한 방향 전환이 아니다. 오직 출구-문 자체가 '닫힘'에서 '열림'으로 '뒤집힌다.' [여기서 앞서 말한 가짜 눈물로부터 진짜 눈물로의 개방이 있다.] 우리의 심리 안에서 꽉 막혀있던 [아마도 무의식을 향한] 방향으로 '새롭게 길이 뚫리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강조건대 변화는 이쪽에 저쪽으로 우리 존재가 이동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변화는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다. '동일한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두 방향으로, 서로의 반대 방향이거나 평행을 이루는 두 방향으로 '끊임없이, 지칠 줄 모르고 움직이는' 것이다. 언제나 '제자리에서 뒤집히는 것'이다. 진정한 삶이란 그런 것이다. 페소아처럼 두 개로 분열된 내 삶의 무대 중 그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 말이다. 그렇게 해야 삶이 새로운 방향으로 뒤집히는 순간 또한 놓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삶에 관한 한 무엇이든 부정[억압-부인]하는 것은 삶을 거짓으로 추락시킬 뿐이니까 말이다.
 

삶은 반복이다. 삶은 지속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곧바로 사라져버리면 그것을 삶이라고, 그것이 삶이었다고 말할 수나 있을까. 삶에 대한 어떤 것이든 그것은 '보존'되어야 한다. 어떠한 사건이 벌어지든 그것은 삶 안에서 일정한 자리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러한 삶의 형식은 '지속'이다. 지속, 이것만이 삶의 유일한 명령 같아 보인다.

무엇보다 삶은 ‘태어나는 것’이다: 삶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은 시작의 열정, ‘가장 뜨거운 열정’의 시작이다. 시작에서의 삶은 ‘모든 것’ 곧 사랑과 열정이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작은 언제나 ‘보존’되어야 할 것으로만 태어난다: 시작은 ‘시작으로서’ '시작이 아닌 것', 뒤따라오는 것들에 의해서 보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시작 또한 ‘존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속’이 ‘시작을 품는다.’
 

그런데 ‘지속’이 삶을 ‘낡게 하는’ 것이라면, 때때로 ‘김빠지게’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새 것과 낡은 것의 구별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작과 지속의 관계: 새 것은 시작하는 것이고 낡은 것은 지속하는 것이다. 지속 안에서 모든 것은 낡아져만 간다. "녹은 잠들지 않는 것이다."(Rust never sleep!) 우리가 때때로 느끼는 사멸의 예감과 우울의 정동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왜 ‘지속’은 ‘낡은 것’, ‘낡아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인가. 왜 열정이 아닌가. 왜 언어의 연쇄 메커니즘인 환유는 ‘지속’하기만 하는가. 왜 환유 속 욕망은 실재에 대한 방어, 스크린, 봉합에 머무는가. 그것은 왜 시작의 열정, 실재의 상실분 모두를 채우려는 강렬한 사랑의 열정이 되지 못하는가. 왜 실재-진리에 대한 접근이 아닌가.
 

‘욕망은 타자의 담화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이 두 명제는 동일한 함의를 갖는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에게 철저히 타자인 것인 기표 사슬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담화 안에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우리는 타자의 담화로 쓰여진 대로만 욕망하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말이다.
 
새 것, 유일한 것은 기표를 갖는다. 새 것, 시작의 기표, 첫 번째 기표가 있다. 이른바 주인 기표다. 주인 기표 S1은 우리 육체의 존재, 곧 우리 자신인 ‘모든 것’을 억압하고 우리의 심적 구조에 ‘텅 빈 공동’ 곧 ‘공백’을 만들어내면서 [언어에 의해 축성되는 우리의 심적 구조 안에서 육체의 실재의 자리를 ‘비워내면서’, (아이-주체에게는 ‘나의 육체와 어머니-큰사물’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내 육체의 실재라고 믿는 욕망의 대상의 실재인 어머니-큰사물의 자리를 ‘비워내면서’] 그렇게 상실한 모든 것을 ‘되찾고’ 그 공백을 ‘채우고자’ 하는 열정과 사랑을 낳는다. 삶의 시작, 시작에서의 삶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열정과 사랑’의 탄생 말이다. 이후의 모든 시작은 이러한 최초의 시작을 되풀이한다. 모든 시작에서 우리는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열정과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살아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 '모든' 시작에서 우리는 삶을 ‘진정으로’ 향유한다. 시작에서 삶은 언제나 유일하게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시작이란 언제나 ‘다음의 것’에서만 그 존재를 보장받는다. 다음에 이어지는 무엇인가가 언제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작 다음’ 곧 ‘그래서’가 언제나 요청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러한 상황은 언어 안에서 최초의 은유로부터 시작된 기표의 운동이 환유를 통해서 무한히 확장되는 사실에서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시작과 지속, 새 것과 낡은 것은 정확히 은유와 환유의 구별과 동궤에 있다. 은유는 시작이고 환유는 지속이다.
 
그러니까 언어 안에서, 그리고 언어를 따라서 사유하고 지각하는 우리의 심리 안에서 환유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환유는 필수적으로 일어나야 하고,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그러한 일이다. 환유‘만’이 삶을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환유가 없으면 은유 또한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지속’이 ‘시작’을 품지 않는다면 ‘시작’은 ‘존재함’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환유의 지속 운동이 언제나 ‘낡은’ 것이라는 점, 즉 언제나-이미 '새것이 아닌' 것이라는 점,  ‘낡아지기를 멈추지 않는’ 그러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환유-지속 안에서 삶이 ‘낡아지는’ 까닭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기표의 환유 운동 안에서 기표는 거의 온전히 ‘타자적’이 되어간다(?)는 점에서 말이다. 라깡의 ‘오토마톤’ 개념을 떠올려 보자. 기표는 ‘자동운동’을 하는 기계와 같다. 기표가 연쇄하는 운동 자체에는 주체의 개입이 [아마도 거의] 필요가 없다. 기표는 ‘스스로 작동하는 기계’와 같다.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의 부록에서 임의적인 동전 던지기가 만들어내는 기표 사슬을 떠올려 보라.] 그것이 앞서 말한 ‘타자의 담화’의 논리다. 그러니까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인데 그 타자의 욕망의 담화, 즉 언어가 만들어내는 ‘임의적인’ 논리를 따라 '기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기표의 임의적 논리란 이렇다: ‘출근을 했으면 일을 해야 한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나는 한국인이다’ '미인은 잠꾸러기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등등. 언어는 단지, 앞서 말해진 기표에 ‘연결될 수 있는’ 기표라면 어떠한 기표든지 ‘어떠한 열정도 없이’, ‘어떠한 사랑도 없이’ 연결하고 그 연결을 자동적으로 되풀이한다. 그 기표의 반복적 연결은 그대로 하나의 규범이 되어버린다. 기표의 자동운동 과정에서는 ‘시작으로서의’ 열정과 사랑이 빚어낼 예외의 사건[창조의 사건] 곧 ‘첫 번째 기표의 사건’은 이른바 ‘순조로운’ 연결을 방해하기 때문에 억압하는 방식으로만 환유된다.
 
‘나는 달리기 선수다, 달리기 대회를 나가면 1등을 목표로 달려야 했다, 그래야 쾌락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나는 실패했고 고통스럽다.’ 우리가 일상에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러한 논리는 따라서 위의 기표의 환유 논리에, 타자의 담화에 철저히 종속되어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되새겨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물론 기존의 ‘욕망의 논리’ 안에서 고통스럽고 슬픈 사태인 것이 분명하지만 [부정될 수 없지만], ‘새로운 삶’의 관점에서는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낡은 것’ 즉 '결코 새롭지 않은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본질적으로 ‘언어의 가상’ 안의 고통, 슬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대부분의 슬픔과 고통은 사실상 ‘가상’의 슬픔, 고통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가짜’다. ‘실재’를 뜻하는 바로서의 ‘진짜’는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바디우의 ‘참된’ 것이 바로 이러한 가짜와 다른 것, 실재인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읽게 되는데, 그렇기에 바디우를 따라서 ‘새로운 인생’이란 ‘참된 삶’이어야만 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참되지 않으면 삶은 새로울 수 없다고 말이다.

언제나 모든 것은 시작에서 참된 것이고, 시작은 그 참된 것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간직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바로 ‘낡아져 간다.’ 점점 더 가상의 것, 임의적인 것이 되어간다. 진정 ‘김이 새는’ 일이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우리의 삶이 ‘낡아지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 '낡아만 가는 것'이 우리 삶의 무대를 '현실(reality)'라는 이름으로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될’ 것인가?
어떻게 ‘다시’ 참될 것인가?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
어떻게 다시 '시작의 열정' 안에서 살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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