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0. 새로운 인생

새로운 인생 (2) : 문학으로서의 삶

라깡함께걷기 2023. 11. 26. 14:07


쓴다는 것, 그것은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의 메아리가 되는 것이다.(블랑쇼, <문학의 공간>)


새 것에 대한 열정, ‘다시’ 새 것으로 돌아가는 열정, 나는 이것을 ‘은유의 열정’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니체를 따라서 ‘문학으로서의 삶’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 그것은 ‘시작의 열정’이기 때문이다. 블랑쇼는 말한다: “시는 시작이다.” 시 곧 문학은 ‘시작할 수 없는 것을 시작하기’다. 기존의 상징계가 보장하는 어떠한 주춧돌도 없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 바로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가능한 시작’으로부터 ‘열정과 사랑’이 태어난다.
 
바로 이것이 라깡적 의미의 은유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은유는 언제나 ‘시작’이고, 그 시작에서 ‘상실’과 ‘태어남’이 교차한다. 은유에 의해서 우리는 존재를 상실하고[억압], 그것을 대신할 쾌락-대상[가치-의미]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열정과 사랑의 탄생]. 모든 은유 즉 최초의 은유를 되풀이하는 기표들의 ‘재은유화’의 계열 안에서 ‘반복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실과 태어남이다. 그것은 분명 내가 앞서 말한 ‘열정과 사랑’의 (재)탄생이다.
 
세계에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무]로부터 ‘무엇인가가 생겨나는’[유] 기적과 같은 사건일 텐데, 바로 그것이 은유에서, 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은유는, 시는 ‘새로움의 열정’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인생’에 대해서 ‘은유로서의 삶’이라고, ‘문학으로서의 삶’이라고 다시 이름 붙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주 적절한 명명일 것이다. 새로운 삶은 전적으로 은유에 바쳐지는 삶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수전 손탁의 ‘은유로서의 질병’이라는 기표는 정확히 라깡의 ‘증상으로서의 은유’라는 언명을 떠올리게 한다. 손탁과 라깡을 따른다면, 새로운 인생은 ‘증상에 바쳐지는’ 삶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증상은 ‘억압된 것의 회귀’이며 따라서 ‘실재의 귀환’이다. 즉 은유로서의 증상은 ‘참된 것’[실재]이 ‘되돌아온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바디우를 따른다면[물론 전적인 나의 해석이다!] ‘삶은 참되지 않고서는 새로울 수 없기에’ 나의 삶이 ‘증상 안에서’ ‘실재’를 귀환시키는 여정에서만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질병은 우리를 서서히 자유롭게 만든다. 질병은 나에게 새로운 단절, 모든 폭력적이고 불쾌한 과정을 허용해준다. (......) 질병은 동시에 내게 모든 습관을 뒤엎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준다. (......) 사유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질병의 가장 큰 선물이다.”(니체,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은유로서의 질병 곧 증상은 ‘무의미’다. 그것에는 상징계가 승인하는-가치를 부여해주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상징계의 관점에서는 증상은 불필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징계를 훼손하기까지 한다. ‘무의미란 의미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무의미는 ‘의미의 무화’다. 무의미는 상징계 안에서 확인되는 ‘죽음충동’이요 상징계의 오토마톤[자동운동]을 뒤흔드는 튀케[우연]이다. 강조건대 은유란 무엇보다 이러한 ‘무의미’, ‘무화’다. 그것은 태초에 ‘사물을 살해했듯이’ 다시 기성의 세계를 ‘파괴’한다. 무로 만든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것’을, ‘새 것’을 요청한다.
 
은유는 따라서 무엇보다 ‘절단’이다. ‘절단’된 모든 곳에서 환상이 피어난다. 팔이 잘린 사람은 그냥 팔을 잃고 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새로운 환상을 얻는데, 이제 있지도 않는 팔을 가지고 고통 받거나 그 없는 팔을 꿈의 세계에서 재창조해서 소원을 성취하기를 반복할 수도 있다. 절단은 이렇듯 그 절단면으로부터 ‘새로운 환상’의 열정을 낳는다.
 
따라서 은유가 절단한다면 매번의 ‘새로운 은유’는 ‘다시’ 창조의 열정을 불러낸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은유에 의해서 상징계의 논리가 무화되면서 기존에 안정적으로 유통되었던 ‘의미-방향’이 붕괴된다면, 주체로서 우리는 ‘살기 위해서라도’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의미-방향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생의 절박성[생명을 위한 필요]’에 가까운 요청일 것이다. 아니, 그것은 '인간적인/인간다운' 의미의 '새로운' 생의 절박성 자체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것에 우리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은유는 '증상이고 질병’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대로 방치하기에는 너무도 치명적인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은유의 실천 과정은 아주 단순해 보인다. 그것은 ‘번신’의 경우처럼 그저 ‘몸을 뒤집는’ 행위에 불과할지 모른다. 주체가 그 행위를 하기 이전에는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시작’이었을 수 있지만 행위가 완수된 이후에는 그것은 단지 ‘다른 삶’일 뿐인 그런 것일 테니 말이다. 물론 거기에 걸린 내기의 무게는 육중하고, 그 내기의 판돈은 우리의 ‘삶’[생명] 자체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생사가 내기 걸린 도박과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파스칼 등 장세니스트들이 말하는 ‘은총’의 순간을 생각해 보자: 장세니스트들에 따르면, 은총의 순간 나의 믿음과 더불어 세계가 변화한다. 나는 ‘신이 없는 세계’에서 ‘신이 있는 세계’로 곧바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다른 삶’이 시작된 세계 안에 주체인 ‘내가 가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내가 신이 없는 세계에서 신이 있는 세계로 ‘이미’ 이동해서 ‘그것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순간, 바로 그때가 은총의 순간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은총의 순간이 '진리-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바디우에게는 참된 것은 그러한 은총을 기다리는 것이며, 또한 은총을 맞이할 준비를 서둘러 시작하는 것이다.그렇기에 이미 노인이 된 바디우의 낙관은, 참되고 정당한 것이며, 그러한 낙관 아래서는 어떠한 노인의 삶도 ‘새로운 삶’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삶 안에서 그는 젊은데, 그가 ‘도래할 시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문학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했을 때 뜻하고자 하는 바 역시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나는 해석하려 한다. ‘문학으로서의 삶’, 그것은 ‘새로운 삶’ ‘참된 삶’이라고 말이다. 흔한 오해처럼 문학으로서의 삶은, ‘가상의 삶’에 대한 도취와 실재의 부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현세를 부정하는 가상의 꿈만 꾸고자 하는 삶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의 상식이 받아들이고 있는 ‘꿈과 현실’의 이분법은 엄밀히 말하면 ‘오인’에 불과한데, 실상 꿈도 현실도 '동일한' 언어의 환상, 기표가 자동 생산한 ‘동일한’ 논리-축조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는 ‘본래부터’ 거대한 가상의 건축물이었던 것이고 우리는 마치 그것이 ‘실제’인 것처럼 꿈을 꾸면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말이다.
 
문학으로서의 삶은, 정확히 ‘나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이기’다. 물론 문학 역시 허구 곧 ‘가상’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현실, 우리가 실제-세계라고 ‘오인-착각하는’ 리얼리티의 가상 세계와는 달리 문학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자신이 허구임을 속이지 않는 허구라는 것이다. 문학은 허구이고, 그 허구의 '속이지 않는' 시작이다. 그래서 “문학은 순수한 시작이다.”(블랑쇼)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삶을 문학으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내 삶을 순수한 ‘시작의 열정’ 안에서 어떠한 환상-허구의 속임수 없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표명이다. 다만 하나의 글을 ‘쓰고 다시 쓰고 거듭 다시 쓰듯이’ 내 삶을 써내려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허구이기 때문에' '다시 쓰기가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문학은 내 삶의 ‘불가능한 재시작’이 가능해지는 유일한 무대다. 문학 안에서 나는 시작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나는 내 삶을 작가로서 하나의 작품처럼 써내려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피그말리온의 꿈이란 바로 이것이다. '불가능한 시작을 시작하기!'
 
시작은 언제나 ‘무한과의 마주침’이다. 아무것도 없기에 거기에 ‘무한이 있다.’ 무한이 아직 유한에 의해 한계지어지기 전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시작에서 우리는 그러한 무한과 만난다. 내기에 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아무것도 없을 것인가, 모든 것이 있을 것인가.’ 이러한 내기가 아니라면 창조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정신분석의 실천이 최종에 맞닿게 되는 순간이다. 대타자-상징계가 보증했던 모든 가치를 잃고 나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지는 시간, 무엇인가를 나의 것으로, 새로운 나의 것을 창조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 이  시간에 대해 니체는 오전과 오후를 가르게 하는 ‘정오’라고, ‘위대한 정오’라고, 혹은 낮과 밤을 가르는 ‘자정’이라고 이름 붙였다. 라깡은 이에 대해서 ‘가로지른다’[횡단한다]고 언명했다. 중국의 혁명가들은 ‘몸을 뒤집는다’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모든 존재 곧 있음[유]는 무로부터 태어난다. 탄생은 없는 것이 있어지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문학이란 엄밀히 바로 그 탄생이며 동시에 무언가가 새롭게 태어나기를, 다시 거듭 태어나기를 열망하는 행위다. 내 인생이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열망 안에서 내가 살려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이 ‘새로운 삶’, ‘참되기에 진정 새로운 삶’이 되기를 열망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내 삶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는 것이다. 문학으로서의 삶은 어떠한 장식과도 기교와도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바디우를 따라서 ‘진리 절차’ 중의 하나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무로부터 다시 무엇인가가 태어난다. 그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례들을 우리는 예술 작품을 통해서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러한 것이다. '흑백'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다. 내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영화 속 남녀들의 행위를 사랑의 행위로 받아들이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 영화를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영화 속 남자가 여자의 붉은 입술, 파란 눈에 매혹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또한 남자와 함께 그녀의 붉은 입술, 파란 눈에 매혹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러한 것이 예술 안에서 ‘창조의 불꽃’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우리가 ‘없는 것’을 보고 느끼게 되는 순간 말이다. 흑백 영화에서 ‘붉은 입술, 파란 눈’을 보는 그 '이해 불가능한'  시간 안에서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전적으로 ‘새로운 열정인 사랑’이 그러한 '도약'을 요청하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왜 많은 작가들이 결국에는 같은 이야기인 ‘단 하나의 이야기’를 거듭 되풀이해서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일까. 왜 많은 음악가들이 결국에는 ‘똑같은 노래’인 단 하나의 노래를 조금씩 변주해서 연주하고 있는 인상을 주는가. 아니 에르노 등을 포함한 많은 작가들은 왜 수십 년 동안 같은 이야기를, 같은 고통을 되새기듯이, 되씹듯이 ‘다시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가. 왜 동일한 것을 되풀이하는가. 왜 같은 것을 거듭 쓰는가. 왜 똑같은 노래만 부르는가.
 
문학은 은유다. 글쓰기 안에서 [오직 글쓰기 안에서만] 하나의 사건이 무한히 되풀이될 수 있다. 그것이 ‘거듭’ ‘똑같이’ 그러나 ‘다르게’ 변주되어서 쓰여질 수 있다. 여기서 ‘동일한 것’은 물론 ‘시작’이다. 시작에 ‘무가 있고 곧바로 존재[에의 열정]이 태어난다.’ 바로 그 시작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려낼 수 있는,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는 ‘실재적인 것’ 곧 ‘진짜’다. 우리가 상실했던 ‘모든 것’, 우리가 때때로 경험하게 되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상실감의 근원으로서의 ‘모든 것’이 ‘거기 없음’이, ‘거기 있었지만 사라졌음’을 ‘알게 해주는’, 또한 그 사라진 것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줄 만큼 '거대한 구멍으로'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무한’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작가가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쓰게 된다는 것은 단지 더 많이 회상하고 더 많이 기억해내서 과거를 온전히 복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온전히 복원해서 수선하고 수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동일한 것에 대해 쓰는 작가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상실’과 그 이후 ‘세계의 창조’[‘상실 이후의 세계의 축성’, 물론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으로만 남아 있을 수도 있다]의 사건을 거듭 되풀이해서, 자신의 삶을 ‘영원한 시작’ 안에 두면서 언제나 [물론 글쓰기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덧붙이는데 ‘반복’ 안에서, 반복의 글쓰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과거의 복원도 재생도 아니다. 그것은 창조다. 글쓰기가 최초의 시작을 되풀이하려 한다고 했을 때 그 글쓰기는 언제나 최초의 시작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시작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과거를 쓴다. 그 과거를 상실했기에, 곧 그것은 과거의 것이 되었고/'낡아졌고', 더 이상은 지금이 아닌/지금에는 '없는' 것이 되었기에 그것을 '다시'  쓴다. '없는 것'을 '되살리기 위해' 그는 쓴다. 그러나 그가 다시 쓰는 것은 그러나 이전의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닐 것이다. 사라진 것은 돌이킬 수 없고 그것은 돌아온다면 그것은 '언제나 이미 상실된 것으로서 재발견되는 대상'으로서만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복 안에서 회귀하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반복(하기)는 언제나 '재발견의 형식'으로 '새 것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 안에서 진정한 창조가 일어나고 반복만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쓸지라도 언제나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쓴다고, 그 자신의 새로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기에 보르헤스가 자신의 작품 <‘돈키호테의 저자, 메나르’>에서 썼듯이, 돈키호테를 ‘단 한 글자도’ 다르지 않게 베껴 쓴 메나르의 작품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보다 월등히 창조적인 작품인 것이다. 무언가를  '다시'[되풀이해서] 쓰기 '시작할 때' 그 시작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의 시작인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만이 시작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우리는 반복 안에서만 시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만이 반복 가능하다고. 그리고 그 새로움-반복의 쌍, 새로운 시작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 곧 '참된 삶으로서의 문학 아닐까?


이제 다시 페소아와 만나 보도록 하자. 페소아에게 세계는 두 개로 분열되어 있다. 일상을 지배하는 낮의 세계와 문학이 숨을 쉬는 밤의 세계. [이는 젊은 시절 카프카가 글을 쓸 시간이 언제나 부족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끊임없이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페소아에게 “인생과 동일한 길이지만 다른 곳에서 머무는 예술, 살아가기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해방된 예술”이 있었다. 그것은 페소아가 자신의 3층 다락방에서 보존하고자 했던 예술이다.
 
“내 경우에 내가 기대하는 두 개의 현실은 똑같이 중요하다. 그것에 나의 독창성이 있다. 나의 비극은 어쩌면 그것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희극도 있을 것이다.” “어두운 사무실에 관한 쓸데없는 이야기를 균형 있게 쓰느라, 나는 책상에 몸을 숙인 채 부지런히 글을 쓰고 있다. 동시에 나는 그와 똑같이 집중하여 존재하지 않는 동양의 풍경을 통과하는, 존재하지도 않는 대서양 횡단 증기선의 항로를 생각으로 따라간다. 두 가지 모두 눈앞에서 똑같이 볼 수 있으며, 똑같이 선명하다.”(<불안의 책>)
 
“나는 비열한 해방과 같은 꿈을 거부한다. 그러나 나는 실제 현실의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지저분한 부분을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가장 강렬하고, 절대로 변하지 않는 꿈의 일부를 살고 있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동안 술에 취하는 노예 같다. 요컨대 한 몸에 두 개의 불행이 산다.”(<불안의 책>)
 
페소아에게 두 개의 세계의 존재는 명확하다. 그리고 그 두 세계 안에서의 삶을 저울질한다면, 아마도 젊은 시절 카프카가 호소했듯이 ‘낮의 현실’이 ‘밤의 현실’을 압도하는 무게로 그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독자인 내가 계속해서 그의 삶의 암울한 풍경을 읽게 됨에도 불구하고 페소아는 계속해서 ‘글을 쓴다’,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페소아는 엄청나게 많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왜 썼을까. 왜 멈추지 않고 글을 썼을까. 왜 글쓰기를 멈추지 못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는 글쓰기 안에 ‘시작’이 있음을, ‘시작의 열정’ 안에서 ‘새로운 삶’이 있음을 ‘글쓰기 안에서’ 몸소 체험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겉보기에 결코 화려하지 않았고 그가 그러한 외양의 화려함, 낮의 영광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눈에 띄지 않았던, 어두운 밤 자신의 다락방 안에서 몇 시간의 글쓰기가 가져다주었던 삶, ‘새로운’ ‘진짜 삶’! 블랑쇼에 따르면, “문학은 시작이라는 유례없는 격렬한 긍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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