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내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왜 푸코가 아니고 라깡인가?”였다. 간호사를 하다가 철학과에 오게 된 이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사람들은 내가 라깡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 왜 그런 질문을 나에게 하는지 불쾌하다기보다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푸코를 전공하면 좋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질문에 대해 농담처럼, 푸코로 갈 수도 있었겠지만 돌잡이를 라깡으로 했을 뿐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심리학과 정신질환에 관심이 많았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왜 나는 미치지 않고 정상인인 것인가?'라는 의문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프로이트와 관련된 책을 뒤적거려 보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나는 관련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간호학과로 가게 되었다. 정신질환을 다루기도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생리학적인 기전 그리고 약물에 대한 이론과 더불어, 프로이트에 대해서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프로이트를 직접 읽으며 공부한다기보다는 정형화되고 이론화된 프로이트를 공부했는데, 그 외에도 프로이트를 이어받은 다른 이론에 대해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 라깡은 없었다. 오히려 라깡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교양으로 들었던 어떤 과목에서 ‘욕망이론’이라는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는 과제에서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라깡의 이름을 들었다. 그러나 정신분석가라기보다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일 거라고 어림 짐작하며 넘겼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나는 여러 선택지 중 라깡을 선택하기보다는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기로 했으니 또다시 그와의 만남은 비껴간 셈이다.
따라서 왜 정신분석인가?라는 질문은 나에게 있어서 왜 푸코도, 프로이트도 아니고 라깡인가?라는 질문으로 이행해 간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반드시 라깡이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이유가 없다는 말은 여기에 ‘필연적으로’ 라깡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론과 학설이 있고 좀 더 대중적인 학자를 택할 수도 있으며,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 이야기하는 ‘왜 라깡인가’에 대한 답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답안이나 누군가에게 라깡을 권유하거나 설득하기 위해 내놓는 응답이라기보다는 나 스스로의 고유하고 개인적인 이유에 가깝다.
한 인간의 인생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종교적인 신성한 체험일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사건일 수도 있고 피할 길 없는 사고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한 하나의 문장일 수도 있다. 나에게 있어서 라깡은 우발적으로 마주친 사건인 동시에 피할 수도 있었을 사고였고 삶의 어떤 궤도를 바꾼 변곡점이었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수많은 그럴듯한 이유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내가 라깡을 고집하는 이유는, 달리 이야기하자면 내가 라깡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내 삶과 관련이 있다. 내 삶이 변화한 국면에는 언제나 라깡이 있었다.
현정
Q. 왜 푸코라고 묻는 겁니까?
A. 그 이유를 제가 직접적으로 물은 적은 없지만 푸코의 저작과 연구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푸코의 수많은 저작 중 광기의 역사라는 책에서 그는 르네상스, 고전주의, 근대 각각에서 광기가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광인들의 배를 통해 육지 바깥으로 내보내지는 방식으로, 고전주의 시대에는 감옥에 수감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근대에는 치료해야 할 정신병을 앓는 사람으로서 정신병원에 광인들은 격리되지요. 그 외에도 <정신의학의 권력>이라는 책에서 푸코는 정신의학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고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라는 저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제가 정신과 병동에서 1년 동안 머물면서 병원의 시스템에서 느꼈던 실망감과 의료진의 역할에 대한 한계, 그리고 병원에서 일을 하는 동안 느꼈던 의학의 권력 등과 푸코를 중첩시켜 본다면, 제가 그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배경이 충분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Q. 삶의 변화에 라깡이 깊게 영향을 미쳤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A. 일단 제가 병원을 그만두게 된 것은 <고독의 매뉴얼> 때문이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변화인 셈인데, 그 이후에도 저는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 교육분석을 받고 공부를 시작했으며 프랑스어까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라깡을 만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또 현재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도 인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함이라는 이유와 더불어, 라깡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이유도 있기 때문에, 제 삶에 있어서 굵직한 선택의 순간에는 항상 라깡이 있었다고 저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승만
Q. 선생님과 라깡의 만남은 ‘튀케’를 떠올리게 합니다. 라깡과의 우연한 만남과 다른 강렬한 우연한 만남과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은 무엇일까요? 가령 왜 푸코가 아니라 여전히 라깡인가요? 아니면 푸코이면서 라깡인가요? 말장난 같지만 푸코이면서 라깡이지만 여전히 라깡과의 만남이 더 중요하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물론 글의 마지막에 이미 답을 하신 듯하지만 그래도 묻게 되네요.
A. 일단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라깡과의 우연한 만남과 다른 강렬한 우연한 만남과의 다른 점은 크게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다른 강렬한 우연한 만남들은 한 번 찾아오고 그치는 반면, 라깡은 반복적으로 찾아온다는 데에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푸코가 아닌 라깡에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푸코를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한데, 그것은 부차적인 수준이고 푸코이면서 라깡이라기보다는 "푸코보다는 라깡"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푸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제가 본 글에 쓰지는 않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임상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적 실천'을 할 수 있는 라깡을 결국에는 택하게 될 것 같습니다.
Q. 왜 정신분석과 만나게 되었는가.
내가 상처 입은 자이다.
아마도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제 글에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저는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요즘 근원적 외상과 관련되어 떠오르는 기표들이기 때문입니다.
A. 선생님께서 남겨주신 글을 읽으면서, 누락된 저의 '외상적 사건'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누락시킨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제가 라깡을 알게 되었을 때의 매혹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정신의학의 담론에 대해 느꼈던 균열, 겨우 봉합되어 있다고 느꼈던 그 지점, 의심스럽지만 물을 수 없었던 지점을 라깡이 벌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라깡에 빠져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유의 전부라면 앞서 논의했던 대로 저는 푸코로 갔을 것입니다. 제가 라깡에게 매혹을 느꼈던 또 다른 이유는 제가 라깡을 모르던 시절 해왔던 생각과 마주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달아주신 댓글 중 이 문장이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상처 입은 자이다." 이 문장을 조금 변주해 보자면 "나에게 결여 혹은 균열이 있다"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균열을 봉합하지 않은 채로 벌려 두면서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길을 라깡이 열어주었다는 정도로 답변을 마칠까 합니다.
역으로,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그리고 근원적 외상과 어떤 연관이 있을 지 궁금합니다.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니면서 전부인 것, 그것이 우리에게 근원적 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요?
▶(승만) 모든 것이 없음이 될 때 즉 상실될 때 주체인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만 남아 있다고 느낄 수 있겠다 싶은 겁니다. 상실의 우울함, 저는 그것이 외상적인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전부인 것은 공백을 가리키는 것일텐데, 저는 주체인 내가 느끼는 상실감에 더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화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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