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이란 무엇일까.
정신분석은 단순 명쾌한 대답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을 품게 만드는 다수의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왜 상심하는가. 왜 이렇게 느끼고, 왜 이렇게 생각하며, 이렇게 믿는 것일까. 느끼기 싫어도 느끼게 되고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에 갇히는 일이 어째서 벌어지는 것일까.
이렇게 정신분석은 묻는다. 그렇게 묻는 것만이 답을 찾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정신분석이 믿기 때문이다.
때로 나는 아프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우울하다. 때로는 그러한 것들을 견딜 수가 없다.
그때마다 나의 곤경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무엇으로 인해 나는 그러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는가. 나의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정신분석은 어떠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러한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정신분석은 자신의 곤경 속에서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는 자를 기다린다고. 가장 고독하고 가장 우울하며 가장 공허한 내면을 가진 자를 기다린다고.
기독교 성경에서 말하듯이 ‘마음이 가난한 자’를 정신분석은 기다린다고.
그런데 우리는 왜 마음이 가난한가.
왜 빈곤한가.
왜 없는가.
정신분석의 대상은 단언컨대 ‘나’다. 모든 문제는, 그것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결국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상 아픈 것도 ‘나’이고, 슬픈 것도 ‘나’이며, 기쁜 것도, 고통스러운 것도 ‘나 자신’이다.
여기서의 ‘나’는 유아독존 나르시시즘 과잉의 ‘나’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나’를 위한 ‘이익’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물론 나의 이익의 문제가 언제나 중요하기는 하다.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내가 나 자신인 것으로 존재하기’, 이른바 ‘나 자신인 바 되기’가 바로 그것이다. 관심과 평가가 중요해진다. ‘진정한 나’가 누구인지, 지금의 내가 그러한 존재인지를 사방팔방으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찾아 절박하게 묻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자존감과 정체성 등의 단어가 언제나 우리에게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 나가 어째서 나인가?’ ‘진짜 나란 것이 과연 있는가?’ ‘나,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렇게 나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물을 때마다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더 강해진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더 큰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그때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없고 텅 비어 있다는 느낌 곧 ‘공허’와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물을 때 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정말 이상한 경험이다. 나란 나 자신의 전부, 모든 것인데도 내가 자신을 찾는 물음 안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게 되는 기이한 일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는 것일까.
나 자신에 관한 물음을 던질 때 나는 ‘나의 모든 것(all)’을 잃고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추락한다. 이것이 바로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가장 치명적인 ‘절망’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신분석 여정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다.
정신분석은 오직 ‘나’만을 다루게 되지만, 그 ‘나’가 봉착한 절망과 공허의 사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원에서 ‘근원적 상실’이 일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진짜 나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또한 사실상 ‘우리 존재의 전부일 수 있는 것’을 잃어버렸다는 크나큰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텅 비어’ 버렸다, 그래서 아프다, 우리는 무의식 안에 그렇게 믿고 있다. 우리 심리의 중심에는
근원적 상실감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정신분석의 근본적인 주장이다.
무엇을 상실했는가. ‘모든 것이다.’
아주 어린 나이의 아이에게 어머니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아이에게 엄마는 결코 타인이 아니었다. 바로 그 자신이었고 전부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언제나 어머니를 잃게 되어 있다. 언제나 이미 잃을 운명이었다. 그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히 엄마 품 안의 갓난아기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언제나 우리 정신의 본질에 있어서는 여전히 아이라고 주장한다. 무의식에서는 우리가 언제나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모든 것인 엄마를 잃고 절망한 아이, 그래서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우울해하거나 하는 아이, 그러한 것이 우리 내면의 아이다. 우리 ‘안’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엄마를 잃은 아이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중심에서 텅 비어 있는 존재고, 그래서 아프다.
물론 이러한 사태는 모두 우리의 ‘무의식’에 기록되어지는 사실이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진짜 곤경을, 그 텅 빈 공허를, 그 안에서 울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나는 타자다(Je est un Autre)’라는 랭보의 유명한 말을 떠올려 보자.
우리의 텅 빈 내면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엄마를 잃은 내 안의 아이는 엄마 대신에 무엇을 그 자리에 가져다 놓았을까. 내가 아닌 것, 정신분석에서 그런 의미에서 ‘타자’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내 안에 들여놓아져 있다.
나는 가장 소중한 것의 상실을 견딜 수 없었기에 내 안에 내가 아닌 것을 채워 넣었다. 그것이 나를 부대끼게 한다. 나를 충동질하고 나를 흥분시키고 나를 좌절시키며 나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나의 욕망이 실상은 바로 그러한 내 안에 있는 타자의 소산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 오인한다.
우리는 상실을 슬퍼하고 결여를 고통스러워하며 고독을 힘들어한다. 그러나 진짜로 우리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상실이 아니다. 우리의 결여가 아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소중한 것, 우리의 모든 것일 수 있는 것을 상실했음을 우리가 망각하고 있다는 것, 아니 적극적으로 망각하려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를 부대끼게 하고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의 실제 원인이다. ‘내가 나를 잃은 자리에 진짜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을’ 채워 넣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나의 곤경’의 실체다.
분명히 하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너’ ‘그’ ‘그녀’ 곧 정신분석의 용어로는 ‘타자’인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상실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모든 것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내 안에 커다란 구멍이 있다면 그것을 메울 것은 타자가 아니라 나여야 한다.
정신분석이 내기를 거는 것은 '상실에 대한 영웅주의’다.
나 자신의 결여의 곤궁을 피하지 말자는 것이다. 엉뚱한 남의 것으로 채우려 하지 말자는 것이다. 마주 보는 용기를 갖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의 결여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결단이 뒤따를 수 있게 된다. 상실에 대한 영웅주의적 행위가 바로 상실한 나에 대한 사랑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실을 회피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기인 것이다. 정신분석은 이런 뜻에서 진정한 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절차일 수 있을 것이다.
현정
Q. 우리는 상실했다는 자체를 망각했다는 것이 진짜 곤경이고, 우리가 상실한 것이 타자= 어머니와의 주이상스였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그 구멍을 타자가 아닌 주체로 메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A. '구멍을 메울 것은 타자가 아니라 나여야 한다'는 문장의 맥락은 나에 대한 타자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에 초점을 둔 표현이었습니다. 오해 가능성이 많은 문장이기는 하지요. 제가 '나'를 주로 '주체'라는 뜻으로 사용하려 했지만 의미가 모호해질 때가 있었던 듯합니다.
서은
Q. 진정한 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절차, 그것은 소위 자아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나를 아끼기' 또는 '나를 사랑하기'의 과정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정신분석적 절차는 여타의 사랑과 무엇이 다를까요? 이 부분이 왜 정신분석인가, 그리고 왜 자아 심리학이 아닌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동감입니다.
Q. 내 안에 들어서 있는 타자를 걷어내고, 상실한 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절차가 정신분석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우리에게 한낱 ‘타자’라고 할 수 있는 정신분석가는 어떤 존재일까요? 혹은 어떤 존재여야 할까요? 또는 질문을 바꿔보자면, 정신분석 없이 진정한 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A. 라깡 정신분석에서 분석가를 대상(a)의 자리에 놓는다는 것은 언제나 타자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분석가의 존재를 지우고 그곳을 텅 비게 만들어 내담자-주체 자신의 존재의 근원적인 결여와 마주치게 하려는 것일 겁니다. 바뀐 질문에 따라 답을 바꾸어 본다면, 사랑은 결국 나의 결여를 대상으로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연인을 향해 내가 갖고 있지도 않은 것, 내게서 결여된 것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은, 사랑이 우리를 망상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더 주목해야 점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내가 나의 결여를 사랑하는 이에게 바칠 수 있을 만큼 결여를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때 나의 결여는 일종의 숭고한 대상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숭고란, 라깡에 따르면, 대상을 큰사물의 지위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니까요.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의 결여가 숭고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Q.(현정) 결여의 상호증여가 사랑이라면 새로운 사랑이 가능함을 믿어야 할 것 같습니다.
A. 사랑의 상호성, 상호주체적인 사랑은 상상계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듯합니다. 사랑이 결여의 증여라면 그 증여는 상호성을 생각지 않는, 돌려받기를 욕망하지 않는 증여일 것입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사랑에서 상호성이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어떤 본질, 진정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서는 일종의 '무조건 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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