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여기서 '우리' 라는 테두리는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우리'일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 일반을 일컫는 '우리'일수도 있을것이다. 인간 일반이라면, 앞서 김서은 분석가가 내놓은 대타자라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욕망'은 '우리의 욕망'과 다른가? 나의 욕망도 결국 우리의 욕망의 방향과 다르지 않았다. '인간의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나의 욕망에서 타자의 욕망을 빼면 남는 욕망이 있기나 한 것인가?
욕망의 원인은 곧 주이상스는 개별적이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욕망의 대상은 한정되어 있다. 사물에서 사람까지 우리는 대상을 옮겨가며 욕망을 추구한다. 물론 '성공', '사랑', '돈' 이라는 추상적인 기표 역시 욕망의 대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욕망의 원인이 무엇이길래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을 갈아치우며,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정신분석에서는 이 욕망의 원인을 '실재'라 부른다.
히스테리자는 타자에게 '당신은 무엇을 원하냐고 묻는다' (che voui?) 타자의 결여를 알아야 그 결여를 보충함으로써 대타자를 만족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대타자는 대답은 언제는 불완전 할 수 밖에 없다. 대타자는 없기 때문이다. 대타자도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히스테리자는 다시 다른 대타자를 찾는다. 우리의 반복되는 질문에 언제나 대타자는 응답 대신 팔루스의 방향만 가르킬 뿐이다. 우리는 그 방향에 따라 타자의 응답을 대신 써넣는다. 그렇기에 이 문답은 내내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다. 대타자가 없다는 사실 가운데, 이제 히스테리자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니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욕망의 원인을 우리는 알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 도 없다. 다만 우리의 욕망의 원인과 결과는 대칭적이지 않으므로 다시 대타자에게 묻듯이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실제적인 대화 속의 물음이 아니다. 무의식 속에 나타나는 '증상'의 물음이다. 증상이 말을 걸어 올 때,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그것은 추락하는 질문이자, 주체를 소멸시키는 무거운 질문이기도 한다. 의식적 주체는 무의식적 주체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니피앙의 논리를 간신히 알아본다 해도 추락을 금할 길은 없다. 실재와의 조우 속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우리는 그동안 없는 대타자의 조율에 놀아났다는 비주체적인 현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체' 그것은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가? '타자적 욕망'에서 '무'의 욕망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상징계 수면으로 올라올 수 밖에 없는 언어적 존재인 인간의 숙명이다. 이제 '무의 욕망' 속에서 '새로운 욕망'이 출현하길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 새로운 욕망이 타자의 욕망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직조한 욕망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수동적이지만, 적극적인 '공백'의 자리를 고수해야 할 것이다.
나는 항상 타자의 욕망을 눈 여겨 보았다. 그리고 항상 알 수 없다고 느꼈다. 그렇게 이자관계의 타자 역시 미궁이였던 것은 그가 표면적으로 욕망하는 것보다 이면의 무의식적 욕망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무의식적 욕망 역시 타자의 욕망이 아닌가? 결국 내가 욕망해야 하는 것은 그의 '구멍'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구멍은 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나의 것'이기도 하다. 두 개의 구멍은 하나의 무의식으로 묶일 수 있는가? 글쎄다..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일상적 차원에서는 비루한 차원의 욕망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 욕망에 복종하고, 벗지 못하는 '빨간 구두'의 우화가 생각난다. 나는 구두를 벗고, 모든 중독에서 벗어나며, 공부를 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나의 욕망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대타자의 만족이 아닌, 그럭저럭의 주체적 삶을 살고 싶다.
고유한 욕망
만약 나의 욕망이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것이고, 거기에 자그마한 집 한채가 갖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면 그 욕망은 버려야할 욕망일까? 정신분석가로 살고 싶다는 욕망은 가짜인가? 정신분석가로 나는 왜 살고 싶다는 것일까? 분석가의 삶을 욕망하기 시작한 것은 결국 '분석가'에게 비롯된 타자의 욕망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욕망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욕망의 시작은 어차피 대타자에게 비롯된다. 그럼 욕망의 끝도 대타자를 만족시켜 결국 대타자의 주이상스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경계한다. 이러한 자신의 욕망 속에 감추어진 욕망은 그저 한낱 어린아이의 소망과 같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유아적 소망에서 어떻게 다른 욕망을 촉발시킬 수 있을까? 우리의 욕망의 구조가 보상체계 였다면 다른 보상체계를 구축하는 것일까 아니면 보상이 아닌, -,+,0 의 상태가 아닌 다른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을까.
결단과 충실성이 필요할 것이다. 현실을 정신분석과 같은 환경, 팔루스보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실재, 구멍에 주목하는 것.. 일단은 하루하루 뺏기지 않은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인간관계, 술, 유튜브, 다양한 문화예술 등등 그것들은 나에게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당겨쓰는 급전과 같았다. 거기에는 언젠가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논리가 숨어있다. 고로 파괴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파괴하고 싶다는 이상한 신화가 있는 것 같다. 불타는 빨간 구두, 이제 벗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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