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신 글들에 조금 긴 댓글, 답글을 올려봅니다.)
1. 나 너 우리, 주체란 무엇인가?
‘나’와 ‘우리’, ‘나의 욕망’과 ‘우리의 욕망’....... 전현정 선생님이 내놓으신 기표들이 제게 큰 울림을 주는군요. 저 또한 ‘나인 것’과 ‘타자인 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나’와 ‘우리’의 구분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 너, 우리 모두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타자’인 것만 같습니다. 결코 ‘내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기표들’ 곧 ‘이름들’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나’라는 기표가 결코 ‘진짜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나’의 동일성이 흔들리거나 무너질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기표 나’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러저러한 기표의 ‘나’라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도 결코 그러한 ‘기표 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결국 언제나 '나라고 기표화되는 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문제는 이렇게 복잡하기만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깡의 명제는 이렇게 ‘나’와 ‘타자’의 경계가 허물어져 버리는 인간적 진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타자 없이 무엇을 욕망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김서은 선생님이 쓰신 대로 “우리는 타자의 욕망 속에서만 나만의 욕망을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욕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타자’가 요청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본인의 욕망이 무엇인가에 답을 하셨습니까? 저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욕망이라는 것은 타자와 관련되어 있기에 우리 내부에 묻는다면 우리 자신을 타자화하여 묻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나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 자신의 욕망’에서 무엇보다 ‘나 자신인 것’에 대해 먼저 묻게 됩니다. 언제나 이미 ‘나’의 자리에는 ‘타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바로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에서의 ‘나’ 곧 주체란 실체적인 것이 텅 비어져 버린 것 때문에 내 마음 속에 공허함만 ‘가득’ 남겨진 자리인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무엇인가’를 채워야 할 절박한 요청으로 가득한 텅 빈 장소 말입니다. 그 ‘텅 빈 곳’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요청(혹은 재촉)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었으니까 채워야’하는 것이지요. 결여되어 있으니까 욕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가득’이라고 지칭한 무엇이 바로 욕망, 더 정확히는 ‘충동’ 같습니다.
저 역시, 현정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자신을 타자화’하면서 욕망의 질문에 응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란 기표에 관한 이러한 고민에서 ‘나’에 대한 우리의 뿌리깊은 고정관념 또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에서 ‘나’는 언제나 이미 ‘자아’ 곧 자의식(나에 대한 의식)으로 귀결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신분석을 이야기할 때에도 우리가 ‘일상의 언어습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주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란 우리에게 언제나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주체’라는 것은 뚜렷한 실체가 없어 보이고 어떻게 보면 때때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지명되고 이름 붙여지는 것인 것처럼 보이기에 우리는 ‘주체’를 이야기할 때조차 곧바로 그 주체를 ‘나-자아’로 귀속해버리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라깡을 따라서 ‘주체’를 이야기할 때마저 우리가 가리키는 곳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자아’일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자아와 주체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니까요.
‘나 자신인 것’ ‘타자가 아닌 것’ ‘진짜 나’ 곧 주체를 의식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나’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는 생각됩니다. 정태적인 위치에 있을 때마다 곧 행위를 멈추고 잠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이미 자아’로서 사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체’는 언제나 ‘달의 어두운 쪽’에 가려져 있습니다. 의식으로서는 현실에 대한 능동적 담지자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의식의 이면일 뿐이며,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충동과 욕망을 실현하고 있는 ‘누군가’로서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으로서는 ‘주체’는 언제나 낯선 ‘타자’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주체일까요? 그게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진실-진리인 육체의 충동을 실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주체’라고 이름붙일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진짜인 것’의 실행자, 진리의 행위자인 것이 주체라는 겁니다.
데리다나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환대’, 라깡의 ‘이웃’ 개념을 이렇게 이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라는 텅 빈 장소에서 ‘낯선 타자를 받아들이기’, 그러나 현행의 고정관념의 권력으로서의 타자인 바는 아니고 내 육체의 진실의 담지자인 무의식으로서의 타자, 바로 ‘그것’(Es)을 받아들이기. 뒤집어서 말해 나-진실-타자의 무의식의 장소에 내가 감으로써 주체인 바 되기.
주체화의 실천이 있다면 이렇게 무의식에 대한 환대 형식의 실천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주체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주체화란 언제나 새롭게 등장하는 물음과 같은 것일 테니까요.
2. 욕망의 장애
“삶에 대한 불감증. 살아 있으나 죽음과 유사한 불감증”
김정철 선생님이 남기신 기표 또한 제게 큰 울림을 줍니다. 물론 저는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고 ‘느끼기 싫다’(‘hate to feel’이라는 노래제목이 떠오르는군요)라고 말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제 삶이 우울증적 색채가 더 짙다고 제가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암튼, 정철 선생님과 저의 차이를 강조하고 싶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욕망하는 기계들, 욕망할 줄밖에 모르는 기계들이 자주 고장난다고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정철 선생님의 기표 ‘삶에 대한 불감증’을 사람들은 ‘권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무의미’라고 번역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저는 ‘욕망할 수 없음’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우울이든 불감증이든 문제는 욕망함에 장애가 왔다는 것일 겁니다. 단순화하면 언제나 ‘순조롭게(?) 욕망할 수 없음’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근원적 상실의 존재인 우리에게 언제나 문제는 결여 채우기 곧 욕망인 것이니까요. 항상 욕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더 많이 욕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더 많이 욕망하면서 더 많이 만족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더 많이 욕망할 수 있을까요. 현정 선생님의 기표처럼 우리는 자신을 ’타자화‘하면서만 자신의 욕망에 다가갈 수 있을 겁니다. 라깡이 헤겔의 변증법을 참고하는 이유가 이것이었지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타자화‘하는 것 곧 ’소외‘를 통해서만, ’자신인 것(즉자)‘를 상실(대자, 타자화)하는 것을 통해서만 진실(즉자대자, 욕망하는 주체)의 여정을 출발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현정 선생님의 기표를 더 빌리겠습니다.
“마치 무의식의 주체에게 너의 욕망이 무엇이냐 묻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결국 무의식적 주체는 잃어버린 주이상스에 대한 회고를 욕망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없는 것, 사라지고 만 것이니 포기해야 한다고 하는 그 환상의 0도에서 이제 무엇을 욕망해야 할까요?”
영점(Zero), 그것은 출발점입니다. 어떠한 목표로 향하는 출발이 아니라 어떠한 여정의 시작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작의 시작입니다. 앞서 말했지만 0(Zero), 그것은 ‘비었기에’ 채우기를 요청합니다.
영점, 그것은 요청입니다. 욕망의 주체가 재촉됩니다. 물론 어떠한 대상도 그 결여를 채우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결여를 채우려는 욕망만이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듭니다. 그때만이 우리는 ‘살아 있는 주체’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에서 욕망하기를 금지하는 강박증자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바로 욕망의 결핍 때문일 것입니다. (거꾸로 생각해서 우리가 욕망의 결핍을 느낀다면 그것을 우리의 욕망이 초자아에 의해 금지되고 있다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욕망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무조건’ 욕망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욕망해야 합니다.
욕망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다시 출발점 곧 ‘영점’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정신분석에서 ‘죽음충동’, ‘죽음’을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욕망하기 위해서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비울 수 있겠습니까. 바로 ‘나’, ‘이미 나로 있는 것’ 중의 어떤 것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을 ‘나’로부터 비울 수 있겠습니까. ‘자아의 죽음’이라는 기표가 이로부터 탄생합니다.
현정 선생님의 기표 “환상의 0도”가 제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기표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상징적 거세’ 곧 근원적인 소외와 분리 모두를 가리킬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환상의 영도’에 계속해서 머물게 된다면 우울증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겠지만 영도의 지점은 무엇보다 ‘출발점’을 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나의 욕망’에 대해서 항상 의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욕망’이 사실은 언제나 ‘타자의 욕망’이었던 것은 아닌지를 의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타자가 ‘대타자’인지 ‘무의식’인지를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환대해야 할 타자’를 선별하는 시험이라는 것이 욕망의 중요한 절차가 아닐까 싶습니다.
3. 원인 vs 현실추상화
라깡에 따르면 “욕망은 환유”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근원적 대상(나 자신의 존재 자체)을 끊임없이 다른 대상으로 대신하면서 만족을 얻으려 하는 것이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결여 채우기’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불만족하는 것일까요. 욕망의 환유된 대상들은 결코 우리의 근원적 상실을 보상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욕망은 환유입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상실한 대상을 현실에서 대신할 만한 대상들로 번갈아 메꾸어봅니다. 그를 통해서 일정한 만족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상들은 결코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 자신의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나의 욕망’이라는 기표가 실망감을 준다면 내가 욕망한 것의 결과가 너무 보잘것없고 허망한 것으로 드러나기에 그러한 것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욕망의 환유를 통해서 결여를 채운 것들의 허망함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는 ‘불감증’과 ‘우울’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무의식의 자리에, 충동의 자리에,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욕망의 ‘원인’의 자리에 대리표상체로 쌓아올린 대상-기표의 퇴적층이 실로 참을 수 없는 가벼운 것들로 드러나고 맙니다. 덩달아 우리의 존재 또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으로 전락합니다.
환유의 대상들은 우리의 욕망의 (원인)대상인 실재(le Réel, the Real)가 아니라 그것을 추상화하여 가상으로 만든 대상들(Reality의 가상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와 라깡이 말하는 ‘산물’(die Sache)가 아마 그것일 것입니다.
현실에서 유통되는 산물들, 대상들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유된 욕망의 대상들을 부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은 환유되어야 합니다. 욕망은 현실에서 자신의 대상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환유된 대상들이 ‘진짜 현실(실재)’를 ‘완전히 추상화’하여 상징계의 환상 속에 우리들을 완전히 가두도록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언어의-환상세계인 상징계에 완전히 수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징계는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상징계는 우리를 온전히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이 그 불완전한 상징계에 충성스러운 노예가 되는 길밖에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대타자-상징계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실상은 바로 그러한 노예의 삶입니다. 심지어 정신분석을 연구하는 우리 또한 여전히 그러한 노예의 삶에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아무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상징계)의 감옥에 갇혀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언어’가 우리의 감옥인 것으로만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도약’이 요청됩니다. ‘주체적 도약’이 재촉됩니다. 자유는 요구되어져야 하는 것이니까요. 슬픔, 고통, 우울, 권태....... 등의 기표가 아니라 ‘자유’의 기표로 요구해야 합니다. 여기서의 ‘자유’란 물론 ‘시작(의 시작)’, ex nihlo를 뜻합니다.
더 많이 욕망하기 위해서 더 많은 욕망의 환유를 창안해야 하지만 ‘욕망은 다시 은유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욕망의 ‘시작점’을 다시 창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인기표 S1의 기능에 주목하는 후기 라깡의 생각이 저는 이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라깡의 S1 기능을 ‘욕망의 은유’라고 번역해 보고 싶습니다. 새로운 S1의 창안이란 ‘원초적인 억압’인 은유의 재실행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욕망이란 나를 만족시킬 대상을 끊임없이 찾아나서는 여정이 아니라, 나의 근본환상의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잃어버린 대상의 쾌락을 다시 맛보려는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려면 '다시 잃어버려야' 합니다. 0도에 이르러야 합니다. 라깡이 말하는 '두 번째 죽음'이란 이런 것일 겁니다. 최초의 대상에 대한 향수, 근원에 대한 열정이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말입니다.
환유란 근본적으로 공백의 자리에 잘못된 대상 채우기입니다. 잘못 채운 대상이 내 욕망의 원인을 망각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이 ‘원인으로서의 무의식’을 요청하기, 창안하기라면 그것은 바로 이렇게 언제나 이미 잘못된 대상들로 채워진 대상a의 자리를 비우고 ‘대상원인’을 복원시키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아이로 돌아가서’ 말입니다.
이것은 퇴보를 뜻하는 퇴행이 아닙니다. 근원으로의 회귀입니다. ‘아이-되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내가 아이인 그 근원의 장소로 돌아가서 나는 주체가 된다’, 이러한 명제가 성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지금 내가 ‘나’라고 믿는 ‘현재의 자아’ ‘이미 어른으로 굳어져 버린 나’가 죽어야 할 것입니다. 동일한 개별자 안에서 ‘아이였던 한 존재가 죽어야’ 어른이 되듯, ‘이미 어른인 한 존재가 죽으면’ 우리는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무의식에서는 우리는 ‘언제나 아이로 머물면서 아이로서 욕망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한 사명만은 아닐 것입니다.
기표의 대립쌍들:
잃어버린 최초의 대상 vs 그것을 대신하는 대상들
das Ding vs die Sache
되찾은 대상 (a) vs 대체하는 대상들
원인 vs 현실 추상화(욘 엘스터)
은유 vs 환유
S1 vs S2
아이 되기 vs 어른인 체 하기
여성 되기 vs 자신이 남성이라고 믿기
결여 품기 vs 결여 거부하기 (남근 선망과 거세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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