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7

불안의 목적

불안은 나에게 습관이 되어 더 이상 불안하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불안이 무엇일까. 신체적 증상인가? 기분이나 감정인가? 아니면 생각의 막다른 골목인가? 불안은 보고있지만 보이지 않는 상태와 같다. 우리가 불안에 대해 알고 있다면 우리는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불안의 이유를 타진해 볼 수 있고, 불안의 근거을 찾아서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면 사실 그것을 불안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불안은 기표의 환유만으로는 억압되지 않는다. 그러한 불안은 상상계적인 불안이다. 상상계적인 불안은 잉여향유의 매개체이다. 히스테리자의 장난감이다. 그러한 표피의 불안은 기표의 환유를 통해서 잠시 가라앉기도 하지만, 우리의 근원적 불안, 즉 알 수 없는 불안은 모든 것을 앞지른다. 아마 영혼..

2023/18. 불안 2023.10.12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에 대해서마저 우리는 불안해한다. 사실 사랑과 관련해서만 우리는 더욱 더 불안하다. 어째서 사랑이 불안을 가져오는가. 어찌 사랑이 불안한가. 누군가가 불안해할 때 그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나는 가끔 상상한다. 그가 너무 불안해서 사랑 따위엔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을 때에도 역시 그러한 상상을 한다. 나는 왜 모든 게 사랑 때문이라는 이 이상한 억측에 빠져버린 것일까. 한 편의 영화가 있다. 그 제목이 무엇보다 우리를 사로잡는다: Angst essen Seele auf.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2차 대전 직후의 독일. 사랑하는 남녀가 있다. 나이든 독일 여자와 젊은 아랍계 노동자. 둘은 공동체로부터 비난받고 배척된다. 둘은 사랑하기에, ‘그 둘이’ 사랑..

2023/18. 불안 2023.09.23

낮이 남긴 것, 소원 성취, 마비와 귀환

팔월의 첫 달이 집 뒤쪽에 떠오를 때, 네 여자의 편도나무 아래서, 넌 꿈꿀 수 있으리, 신들이 미소 짓는다면, 다른 세상의 꿈들을.‘고대 중국 시’ 낮의 꿈과 밤의 꿈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프로이트에 따르면, 낮의 몽상인 우리의 백일몽(daydream)은 자신이 에서 중심 연구대상으로 삼은 통상적 의미의 꿈인 밤의 꿈과 본질에서 같은 성격을 갖는다. 이른바 ‘소원 성취’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다른 세상의 꿈’, 지금 현재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든 꿈은 이미 그 ‘다른 세계의 무대화’(other scene)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소원성취’란 무엇인가?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

2023/17. 꿈 2023.09.15

압축과 전치, 꿈의 언어법

프로이트는 꿈에서 압축과 전치를 사용하여 무의식의 과정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이 이론에 입각하여 나의 꿈 분석을 시도해 보았다. 꿈에서 압축과 전치는 기표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드러내고, 전치를 통하여 무의식이 검열 내지는 방어를 수행한다. 우리의 언어생활은 전적으로 기표 중심이고, 발화 속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인 말실수는 균열과 오류를 보여주듯이, 꿈에서도 역시 명시된 내용은 무의식과 배치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꾼 꿈이다. 한달이 채 되지 않았다. 친구네 집에 갔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은 친구네 집이다. 친구네 집에서 올려다본 천장에 큰 물고기. 사람만큼 큰 물고기가 머리위에서 왔다갔다 했다. 한 5마리 쯤 되려나. 나는 어떻게 천장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는가 했는데, 사람인 우리도 물 속에서 자연스..

2023/17. 꿈 2023.09.11

정신분석가는 전이 속에서 꿈에 등장한다

덩그러니 잘린 좀비 손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장면에서부터 꿈은 시작한다. 그것을 떼어낸 다음 창밖으로 던져 버렸는데, 이어서 내가 좀비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뒤따랐다. 주변에는 아직 좀비가 되지 않은 인간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그들에게 내가 좀비로 변할 수도 있다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도 같다. 인간과 좀비는 커다란 창고 같은 공간에 함께 있었고 부실한 철조망만이 인간과 좀비가 섞이지 않도록 나눌 뿐이었다. 철조망 바깥에 있던 좀비들은 인간에게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좀비들이 인간들을 향해 들이닥칠 예정이었다. 사실 여기서는 기억이 희미한데, 건물 밖에 있던 좀비가 들이닥칠 예정이었는지 아니면 철조망 바깥에 있던 좀비들이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었는지는 잘..

2023/17. 꿈 2023.08.28

MBTI와 주체의 소멸(김서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필수 관문처럼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바로 '당신의 MBTI는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이다. 이 질문을 주고받는 것은 이제 상대방을 알기 위해 빠지지 않는 절차인 것처럼 보인다. 나의 MBTI, 그리고 내가 마주하고 있는 타자의 MBTI를 알고 싶다는 욕망의 이면에는 내가 누구인지,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MBTI에는 네 가지 항목이 있고 이것이 각각 조합되어 만들어진 16개의 범주가 사람을 구분해 낸다. 각각의 유형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설명되어 있다. 그렇기에 MBTI만 알면 내가 누구인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뚜렷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2023/16. MBTI 2023.08.20

일상 속 신화 MBTI

나의 MBTI는 INTP이다. '논리적 사색가'로 대변되는 이 유형은 다소 소수라고 한다. 문제를 풀며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가늠하면서 솔직한 답변을 되도록 애를 썼지만, 이것이 내가 욕망하는 이상적 자아인지 실제의 내 모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유형을 읽으면서 '맞다' 혹은 '대충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유형이 나왔어도 '대충 맞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점집'이 먹고 사는 이유도 귀신같이 맞혀서가 아니라 인간의 유형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기도 한 이유다. 마치 증상의 이름을 알았을 때의 안도감처럼 우리는 하나의 유형에 수렴될 때, 우리는 어떤 안도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안할 때 마다 그 타자의 기표들을 꺼내 쓴다. 자신은 '논리적 사색가'이며, 그들은 '이러저..

2023/16. MBTI 2023.08.07

기표의 부재와 앎의 의지-'보완'에서 ' 보충'으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최근 들어 자주 듣게 이 말은 언뜻 ‘당신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차피 통성명을 한 후 곧바로 상대를 ‘조금 더’ 알기 위해서 물어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성격’을 ‘유형’지어 검사하는 방법론 자체에 부정적인 사람에게는 그것이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숨기지 말고 말해 보세요!’라고 명령하면서 자신의 페르소나로 공들여 치장된 겉옷을 [어쩌면 속옷마저] ‘강제로’ 벗기려는 행동처럼 여겨져 커다란 불쾌함을 안기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MBTI인 것처럼 보인다. 세상 사람들의 소통은 MBTI를 통해 한층 더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그것의 유통은 날로 확산되기만 하는 것..

2023/16. MBTI 2023.08.07

글쓰기라는 임상

이번에도 너무 늦게 글을 쓴다. 매번 글을 올리는 약속시간을 어기고 있다. 백지같이 아무것도 쓸 것이 없는 것 같은 막막함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한때는 나의 배설물이였던 글들, 그리고 cartel에 참여하면서 쓰게된 발제문들, 정신분석가에게 보낸 메일, 짧은 리뷰들, 그리고 수많은 업무페이퍼.. 사실 머리속에는 끊임없이 생각이 돌아간다. 그 생각들을 지면에 옮기는 작업을 하게되면 아무것도 쓸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머리 속의 쓰레기를 받아 적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무도 그 쓰레기 더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발화하거나 글을 쓰지 않는 이상. 그 오물을 정화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글쓰기 행위를 통해서이다. 내 손은 오물을 거른다. (물론 배설의 글쓰기도 있지만,,,) 생각이 말이 ..

글쓰기, 죽음의 권리

“언어는 죽음을 가져오고, 죽음 가운데 보존되는 삶이다.”(모리스 블랑쇼, ‘문학 그리고 죽음에의 권리’) 블랑쇼에 따르면 우리는 “왜 글을 쓰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고서도 분명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대개 우리가 무엇인가를 쓸 때 그것을 왜 쓰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다시 블랑쇼를 인용하면, “작가가 글을 쓰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될 때, 글은 작가를 바라본다.” 쓰여지는, 잠시 후 곧 쓰여질 글은 하나의 물음이 된다. '지금 나는 무엇을 쓰는가? 그것이 무엇인가?'에서 시작해서 ‘왜 쓰는가?’ '왜 쓰려 하는가?' 그리고 ‘글쓰기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행렬의 물음이 되는 것이다. 내가 실용적 목적에 맞추어진 기능적 글쓰기를 벗어나 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작가'일 때, 나는 글쓰기를 하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