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7

대타자는 극복되어야 하는가(김서은)

이번 글의 주제는 대타자의 극복에 관한 것이다. '대타자는 극복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조금 변주시켜 본다면 '대타자는 극복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발전해갈 수 있다.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질문을 바꿨을 때, 이 문제는 당위를 묻는 것에서 가능을 묻는 것으로 이행해 간다. 그러나 이 논의를 하기 전에 우리는 대타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대타자에는 실체가 없으며 또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타자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을 테지만 거칠게나마 그 윤곽을 그려 보아야 대타자의 극복에 관한 논의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극복을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일이 될 뿐이다. 대타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우리 눈앞에 있는 타자들과는 또 어떻게..

어처구니없게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에는....... 분석의 종결에 ‘주체의 죽음’이 있다. ‘나’의 죽음이 있다. 분석이란 일종의 ‘진리 찾기’다. 내담자로서 분석주체는 자기 삶의 진실 혹은 진리를 찾기 위해 분석실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석 안에서 주체는 자신이 왜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는지, 왜 그 삶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의 대전제는, 주체의 삶이 어떠한 속박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가 그 속박으로 해방되기를 꿈꾼다는 것이다. 분석주체가, 분석이 일종의 해방의 진리를 찾는 과정이 될 것이라는 것에 이미 동의한 채로 정신분석 임상에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분석을 통해 주체가 찾게 되는 진실이란 어떠한 ..

나르시시즘과 대타자의 극복에 대하여

살불살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부처의 이름도 허깨비와 같고 백천선지식의 천만가지 가르침도 남의 살림이다. 오로지 자기 안에서 건져올리고 지금 이순간 드러내야 한다. 경전 속 부처의 말이 아닌, 선어록의 조사 법문이 아닌, 자기의 몸과 마음과 행위로써 경험하고 체득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기 안에 본래 갖춰진 부처를 가린 허물을 벗겨내고 진아로써 현존하는 일이다. 말과 생각으로 지은 허구의 감옥을 깨뜨리고 일체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연기실상 그 자체임을 바로 보는 불교의 수행법으로 조사선, 간화선이 있다. 말과 생각이 끊어진 언어도단이라는 길 없는 길을 찾는 여정에서, 역설적이지만 언어는 깨달음의 수단이 된다. 깨달은 자, 법맥을 이어온 조사들의 선법문을 전하는 스승과..

남근은 없다(김서은)

'남근, 팔루스'라는 개념은 정신분석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동시에 많은 오해를 낳기도 하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 남아는 거세위협을, 여아는 남근 선망을 겪게 된다고 말한다. 거세위협과 남근 선망은 이후 남성과 여성이 사회적인 성 역할을 따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남자아이는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포기하지 않으면 거세당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 어머니를 포기하게 되는데, 그 대신 어머니를 소유하고 있는 아버지처럼 되고자 한다. 아버지처럼 되면 미래에 어머니와 같은 여성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남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사회화가 된다. 반면 여자 아이는 자신에게 남근이 없음을, 자신이 보다 더 결여되어 있음을, 더 ..

그러므로, 남근은 없다

*불교와 정신분석을 연결하는 탐색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세션에 대한 내용은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음을 밝힙니다. 1. 연기緣起. 인연因緣하여 일어남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은 없다. 인에 연을 지어 일어난 것에 이름을 붙여 나, 또는 너라고 부른다. 인과 연의 마주침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상은 존재할 수 없다. 나와 너의 마주침 없이 대상은 생겨나지 않으며, 대상이 있음으로 해서 나 또한 있다. 대상이라는 개념이 생성되면서 대상의 반대편에 나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작다는 관념이 크다는 관념을 만든다. 관념이 제한한 프레임에서는 나를 확인하기 위해 대상을 필요로 한다. 욕망의 작동 이전에, '나'를 성립시키는 존재로서 대상은 요구된다. 상대항으로 연결된 것들의 일어남과 ..

남근을 결국, 잘라내야 하는 것일까

지난 주제 “여성적 욕망”에 대한 글에서 ‘남근’이라는 기표가 문제적인 것으로 등장한 것이 나에게는 문제적으로 보였다. ‘남근’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무엇인 것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라깡의 말이 맞는 듯하다. 남근은 우리에게 명백히 ‘욕망의 특권화된 대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남근, 그것은 왜 우리의 욕망에 대해서 ‘특권’을 갖게 되었던 것일까. 알다시피 그것은 거세 때문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거세란 ‘상징적인’ 거세다. 거세는 실제로 음경을 절단하지 않으며, 다만 그리고 오직 ‘상징적으로’, 그러니까 ‘언어를 통해서’, 그럼에도 ‘너무도 강력하게’ 우리에게 우리 존재의 실재를 잘라내 버린다. 우리가 근원적인 존재 상실을 겪..

팔루스의 몰락과 여성적 욕망

모든 것이 만족할 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다시 불만족 속으로 들어간다. 불만족 속의 만족이 있기 때문이다. 불만속의 만족이란 주이상스의 출몰을 은폐하기 위한 신경증의 도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이상스, 곧 실재는 존재를 압사할 것 같은 '불안'의 정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불안보다는 안전한 불만족 상태에 머무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불만족은 히스테리자의 가면이다. 히스테리는 보통 여성에게 많이 보이는 양상일 뿐 인간 일반이 가지고 있는 특성같다. 히스테리자인 여성은 보통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는 것은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만약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받기 위함이다. 그녀는 왜 ..

여성적 욕망과 여성의 욕망(김서은)

영화를 보다 보면 몇 가지 클리셰들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다고 느꼈던 것은 아이를 향한 엄마라는 여성의 집착이었다. 이언희 감독의 , 아니쉬 차칸티 감독의 ,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등 많은 영화에서 아이에 대한 여성의 사랑이 직간접적으로 다루어진다. 작년에 출간된 앰버 가자의 역시도 뒤틀린 모성애를 소재로 한 스릴러 책이니 영화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처럼 많은 대중 매체에서 아이는 여성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제시된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이러한 영화와 소설 속 여성들에게는 아이 외에 소중한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왜 독특한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아이가 갖고 싶어서 납치를 하는 남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내..

여성적 욕망, 그런 것은 없다?

라깡 정신분석의 고유한 강조점은 인간이 언어 안에서 근본적으로 ‘소외’된다는 것이다. 라깡은 여기서 더 나아가, 남성-여성을 구분하는 성 구분에 있어서도 ‘소외’를 중심에 두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언어에 대해 소외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다. 다르게 이해하자면 남성-여성이 기표로서의 남근(팔루스)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이 언어에 의한 소외를 겪는다는 것은 ‘존재의 결여’를 안게 된다는 것인데, 이때 그 결여를 언어 안에서 표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표로서의 남근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모든 인간 주체가 남근 기능에 의해 구조지어진다는 결론이 나오고, 따라서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남성은 ‘남근 기능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는..

자해공갈의 향락

한때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 적당히 즐기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떤 '힘' 이 드러날 때까지 마셔야 직성이 풀렸다. 그 힘이 나를 부시고, 해쳐도 마침내 그 수준까지 도달해서 의식이 '0'으로 되어야만 했다. 나는 그런 순간이 왔다는 것을 의식이 눈치챈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빨리 그 순간을 넘어서야 했기 때문에 더 빨리, 더 많이 술이 나를 삼켜버리는데 전력을 다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분석을 통과하면서 그러한 '액팅아웃'의 순간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때때로 그때가 그립다. 아니, 무의식이 그 시간들을 그리워 한다고 보는 것이 맞는 말인듯 하다.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넘어가는 순간들은 보통 생생하다. 시계를 보고, 거울 속에 풀어진 눈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