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7

여왕과 여섯 남자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무슨 이야기인가요?” “지어낸 이야기요.” 어느날, 진은 간밤에 지은 우화를 J에게 들려준다. “ 이야기에요. 옛날 어느 나라에 여군주가 살고 있었어요. 성에는 여왕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온나라에서 차출된 남자들로 가득한 하렘이 있었고요. 그런데 하렘이 뭔지 아세요?” “네, 알아요.” “여군주는 하렘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만 몰두해서 대신들은 걱정이 많았죠. 그들은 이러다 여군주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거나 하는 헛소문이라도 퍼지는 날엔 나라에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무래도 지금의 하렘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군주의 파트너를 선발한다는 방을 붙였어요. 많은 남자들이 몰려들었고 대신들은 그 중 몇 명..

2023/11. 질투 2023.05.22

질투(김서은)

1. 자아의 탄생 “나는 내 눈으로 보았다. 유아도 질투심에 사로잡힌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는 아직 말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창백한 얼굴과 독기를 품은 시선으로 젖을 먹는 형제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그는 거울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상황(아이가 바라본다), 감정적 반응(창백한) 그리고 원초적 좌절의 이미지의 재활성화(독기를 품은 시선) – 이것들은 가장 초기의 공격성의 심리적·육체적 좌표들이다 – 를 유년기 초기의 유아 infans(말하기 이전)와 영원히 연결시킨다. 에크리, 정신분석에서의 공격성 138p 라깡은 에크리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유아 시절의 질투를 설명한다. 이 단계에서의 공격성은 거울 단계를 통한 자아 이미지의 형성과 관련이 있는데, 거울 단계를 통한 자아의 이미..

2023/11. 질투 2023.05.21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에크리>로부터

리비도는 성적 본능이 아니다. (중략) 리비도가 성적인 것으로 물드는 것에 대해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본성의 가장 내밀한 곳이 물든다고 단호하게 주장하는데, 그것은 공백-의-색이다. 갈라진 틈으로 들어오는 빛 속에 감도는 색 말이다. _자크 라캉, p.1005~1006 정신분석에서 리비도 개념은 흔히 성적 본능, 성충동의 대명사로 쓰인다. 분석을 통해서 무의식에 억압된 성적 본능을 발견하고 직접적으로나 승화적으로 욕망의 실현을 검토하도록 이끄는 실체적 가이드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라깡의 난해하기로 유명하며 또한 유일한 저서인 에서 발견되는 위 문장은 리비도의, 전혀 다른 시니피에를 말하고 있다. 문장 그대로 그것이 성적인 것으로 ‘물드는’ 어떤 것이라면, 물들여지기 이전의 어떤 상태로서의 리비도 개..

2023/10. 공백 2023.05.07

공백, 에크리튀르, fort-da...... 매혹과 당혹 사이

정신분석이 되풀이해서는 증언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거세’되고 ‘억압’되고 ‘상실’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상실이란 무엇인가? 라깡에 따르면, 우리가 상실한 것은 ‘실재’다. 실재란 ‘the Real’ 곧 ‘무언가 진짜인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어떠어떠한 것, 우리 앞에 주어지는 특정한 사물(die Sache)이 아니다. 그것은 어떠어떠한 정신, 이념 또한 아닌데 실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우리의 지식의 영역 안에서 상징화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재는 쓰여지지 않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큰)사물(das Ding)’로서, ‘언제나 잃어버린 것으로만 재발견되는 대상’이다. 따라..

2023/10. 공백 2023.05.07

공백, 非의미의 사수(전현정)

환상의 횡단 속에서 마주치는 공백 우리는 주이상스를 상실했다와 함께 주이상스를 억압하기 위해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가정은 라깡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대전제로 간주된다. 그러나 억압된 주이상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온다. 어떻게 그것이 회귀하는가. 주이상스의 회귀는 우리 삶 속에 구멍을 통해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증상' 이 그러하다. 정신분석과정에서 우리는 증상을 구성해내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골몰한다. 기존의 담화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구멍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새로운 의미가 분출될 때까지 내담자는 말을 해야 한다. 라깡 정신분석이 기존의 상담과 다른 지점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 구멍을 봉합하지 않는다는 것. 내담자의 고리타분한 서사가 끝이 나면, 기존의 언어가 들어설 자리가..

2023/10. 공백 2023.05.07

공백, 진리의 장소이자 윤리의 장소(김서은)

공백은 무언가가 있었던 흔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기에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실했다는 감각만을,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부재의 감각만을 느낄 뿐이다. 상실을 대가로 주어진 문명은 우리가 결여된 존재임을 감추지만 공백은 때로는 공허함으로, 때로는 설명되지 않는 증상으로, 때로는 불안과 우울의 형태로 불현듯 우리를 찾아온다. 공백과 마주한 주체는 더 이상 세계가 제시하는 환상에 속지 않는, 진리와 마주한 자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마주한 진리란 ‘진리 없음의 진리’이며, 동시에 이곳은 나에 대해 설명해 주던 언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장소이다. 진정한 정신분석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나를 설명해 줄 언어가 없는 몰락의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타자의 언어가 멈춘 그..

2023/10. 공백 2023.05.06

대타자의 장난감(전현정)

대타자의 부흥 라깡의 성도착의 구조를 한마디로 말하면 '대타자 부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대타자를 살려내는 부흥의 가공을 통한 주이상스의 소환이 도착증자가 목적하는 바이다 . 도착증자가 부흥 시키려는 대타자는 상징계 대타자가 아니라, 거세 이전의 빗금없는 대타자A이다. 언어의 거세이전 다형적 충동의 세계에서 유아의 신체는 쾌락이 전부인 신체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주이상스의 대상이고, 이 팔루스와 아이는 자신을 동일시 한다. 이들 사이에 아버지의 개입으로 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와 아기는 서로를 쾌락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어머니는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야 하고, 아이는 법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 어머니 대타자도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면서 거세된다. 죽은 대타자가..

상블랑, 혹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욕망은 법이다. 정신분석 경험에 의해 드러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도착증, 즉 욕망이 법의 구성, 다시 말해 법의 전복으로 출현하는 곳에서조차 욕망은 법의 지지대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도착증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제약 없는 만족으로 바깥에서 출현하는 것이 사실은 방어이자 어떤 법의 실천적 사용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도착증자는 자신의 활동을 통해 자신이 어떤 주이상스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_ 1963년 2월 27일 세미나에서, 라깡 법이 욕망을 금지할 때, 금지는 폐기할 수 없는 욕망을 생산하며 욕망은 다시 새로운 차원의 법으로 쓰여진다. 법은 욕망을 금지하여 그 힘을 잃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욕망을 재구성하여 더욱 강력한 흡인력으로 존재를 압박해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 시선과 응시(김서은)

바야흐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유튜브를 비롯하여 넷플릭스, 왓챠와 같이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서비스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으며 비슷비슷한 콘텐츠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점점 확대된 인간의 보고자 하는 욕망은 단순한 볼거리를 즐기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수준으로까지 넘어가기도 한다. 공공 화장실에 불법 카메라를 설치하는 일은 여전히 문제가 되는 사안이며 N번방 사건은 물론, 최근에는 남성 BJ가 수많은 시청자들 앞에서 잠든 (혹은 술과 약을 먹여 잠이 들도록 만든)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기사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타인의 성행위, 은밀한 사생활을 몰래 엿보고 거기서 쾌락을 느끼는 자에 대해 흔히 정신 의학에서는 관음증이라는 진단명을 붙이고 성도착의 한 종류로 분류한다...

대타자의 복화술

대타자는 말을 하고 충동은 행위(acting out)를 한다. 말과 행위의 부딪힘. 알 수 없는 반복적 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순간. 그 부딪힘의 순간이 어쩌면 무의식 주체의 순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끊임없는 기표연쇄는 즉, 생각은 대타자의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 어떤 말도 새로운 말이 없기 때문이다. 대타자가 부여한 의미에 따라 우리는 말할 뿐이다. 대타자가 언어의 외피를 가진 일종의 환상이라면 충동은 언어를 무시한채 주체를 압박하는 힘이다. 대타자와 충동 두 측면 모두 외부의 소산이다. 대타자에 의한 거세와 충동에 의한 반복 이 두 가지로 인해 인간 주체는 소외당한다. 그러나 충동은 대타자의 결여를 공격하면서 주체를 잠금 해제시킨다. 나는 타자가 아니라, 몸을 가진 실재라는 비명으로 존재감을 드러..